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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이야기 5편 준비됨

성북구 이야기를 찾아볼까요?

이 지역에 전해 오는 이야기를 살펴보고 다른 지역 이야기와 비교해 보세요.

성북구 이야기 (5편)

스무 명이 앉아 쉬던 안암동 큰 바위 -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삽화
지명에 담긴 이야기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삽화🗺 지도

스무 명이 앉아 쉬던 안암동 큰 바위

서울 안암동에는 예전부터 전해 오는 큰 바위 이야기가 있어요. 마을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스무 명이 넘게 앉아 편히 쉴 수 있을 만큼 큰 바위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앉일바위'라 불렀대요. 이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 오늘날의 '안암'이라고 전해져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도 이 일대의 산과 물이 아름답다고 여겨, 자신이 묻힐 자리를 찾으러 여러 차례 안암동을 찾아왔다고 실록에 남아 있어요. 실제로 땅을 파 보니 물이 솟아 나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해요. 이렇게 안암동은 큰 바위 이야기와 왕이 직접 찾아왔던 역사가 함께 어우러진 이름을 갖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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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동을 지켜 준다는 마을 여신 -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삽화
오래 전부터 전해 온 이야기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삽화

정릉동을 지켜 준다는 마을 여신

서울 정릉동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에서 나왔어요. 정릉이 이곳에 자리 잡은 뒤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능말'이라 불렀고, 그것이 오늘날 정릉동이 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이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특별한 믿음이 있어요. 정릉동에는 마을을 지켜 주는 여신이 산다고 사람들은 믿었대요. 만약 이 여신의 뜻을 어기고 마을을 떠나면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아 결국 다시 정릉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그래서 지금도 정릉동 사람들은 해마다 가을이면 산신제를 지내며 마을의 평안을 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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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산이 막아선 삼태기 마을 -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삽화
지명에 담긴 이야기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삽화🗺 지도

호랑이 산이 막아선 삼태기 마을

서울 길음동은 예전에 골짜기가 길게 뻗어 있어 '기리묵골'이라 불렸는데, 이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지금의 '길음동'이 되었다고 해요. 이 마을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삼태기 모양이어서, 사람들은 이곳에 재물이 잘 모인다고 믿었대요. 그런데 마을 앞에는 호랑이가 엎드린 모습을 한 개운산이 삼태기의 입구를 딱 막고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재물이 모이려다가도 호랑이 산에 막혀 큰 부자가 나오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지요. 훗날 마을 곳곳이 개발되면서 호랑이 모양의 산도 많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이제야 삼태기 안에 재물이 잘 모일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곤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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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마다한 선비, 장위산인 -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삽화
사람들에게 전해 온 이야기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삽화🗺 지도

벼슬을 마다한 선비, 장위산인

서울 장위동이라는 이름에는 한 선비의 굳은 마음이 담겨 있어요. 이 마을 뒤에는 '장위산'이라는 산이 있었는데, 조선 말의 문신 윤용구가 바로 이 산에 숨어 살면서 스스로를 '장위산인'이라 불렀대요. 그는 나라가 어려운 시절 여러 높은 벼슬 자리를 여러 차례 제안받았지만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중에는 일본이 주는 작위마저 거절했다고 전해져요. 대신 그는 산속에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조용히 지냈다고 해요. 사람들은 벼슬을 마다하고 산에 숨어 지낸 그의 곧은 마음을 기억하며,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마을을 '장위동'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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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함께 생긴 돌곶이능말 -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삽화
사람들에게 전해 온 이야기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삽화🗺 지도

왕릉과 함께 생긴 돌곶이능말

서울 석관동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하나는 마을 동쪽 천장산의 산줄기가 마치 검은 돌을 꽂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돌곶이'라 불렸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곳의 땅 모양 자체가 곶이처럼 튀어나와 있어 그렇게 불렸다는 이야기예요. 훗날 조선의 20대 임금인 경종의 무덤, 의릉이 이 마을에 자리 잡으면서 사람들은 이곳을 '돌곶이능말'이라 부르게 되었어요.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산 아래에 모여 살았는데, 왕릉이 들어선 뒤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가 살게 되었다고 해요. 돌곶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적은 것이 지금의 '석관동'이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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