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의기사


진주 의기사 — 진주 의기사_후면 전경 (촬영년도 : 2015년)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공공누리 제1유형
성이 함락되고 7만 명이 목숨을 잃은 뒤, 한 여인이 적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면 그 자리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요?
⑥ 내가 발견한 것 정리하기
③ 옛날에는 어떤 곳이었을까?
역사 속 장소
시대: 조선 시대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는데,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명의 민관군과 백성이 죽자 원수를 갚기로 결심했다.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이는 자리에 곱게 단장하고 나아가, 술에 취한 왜장을 남강으로 유인한 뒤 그를 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논개가 강물에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게 됐는데, 원래는 위험해 보여 '위암(危巖)'이라 했다가 논개가 순국한 뒤 이렇게 바뀌었다고 한다. 인조 7년(1629) 정대륭이 바위 옆면에 새긴 '의암(義巖)' 글자가 지금도 선명하다. 2001년 9월 27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됐다. 논개가 죽고 250년 뒤인 1823년(순조 23) 논개의 위패를 모신 의기사(義妓祠)가 촉석루 옆에 세워졌는데, 한 여성을 위해 나라에서 지은 사당으로는 유일무이하다.
한 여인이 실제로 몸을 던진 강물 속 바위가 250년 넘게 이름과 함께 기억되고, 결국 나라가 그를 위한 사당까지 지었다는 사실을 통해, 한 사람의 결단이 특정한 장소를 영원히 특별하게 만들 수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이런 것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 1629년 정대륭이 새긴 '의암(義巖)' 글자
- 위암에서 의암으로 바뀐 바위 이름의 유래
- 논개의 위패를 모신 의기사
- 촉석루에서 의암까지 이어지는 사건의 현장
이 위치가 역사와 어떻게 연결될까?
이곳의 위치: 남강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바위(의암)라는 지형 사실이 국가유산포털·백과 자료로 확인됨.
역사와의 연결: 강 속의 바위라는 지형이 논개가 적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드는 실제 행위가 이뤄진 물리적 무대였다는 연결이 자료에 명시돼 있다.
④ 이 장소와 관련된 사람·사건 찾아보기
- 관련 인물: 논개, 정대륭
- 관련 사건: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1593)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단계에서 살펴볼 수 있어요.
⑤ 과거와 현재 비교하기
- 의암·의기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역사 흔적은 무엇인가요?
- 의암·의기사에 대해 무엇이 더 궁금한가요?
- 의암·의기사이(가) 옛날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보여 주는 증거를 무엇에서 찾을 수 있나요?
- 의암·의기사은(는) 진주시의 역사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 옛날 사람과 오늘날 사람은 의암·의기사을(를) 어떻게 다르게 바라볼까요?
- 친구에게 의암·의기사을(를) 소개한다면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 싶나요?
- 지금 이곳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나요?
- 옛날에는 이곳이 어떤 역할을 했나요?
- 지금과 옛날의 같은 점은 무엇인가요?
-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