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광희

金光熙

1892. 10. 5 ~ 1968. 1. 14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광희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함북 학성(鶴城)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학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2년 10월 5일 함경북도 학성군(鶴城郡)에서 태어났다. 1919년에 블라디보스토크(海蔘衛)로 망명하였다가 상하이(上海)로 갔다. 그해 7월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천도교청년회 블라디보스토크지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아내 김온순(金溫順)은 1925년 6월 조직된 지린부인회 서기를 지내는 등의 공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22년 4월 21일 한용헌(韓容憲) 등 일행 21명과 함께 천도교청년회 블라디보스토크지회 연예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왔다. 이 일행의 목적은 한국 각지를 다니며 음악·무도·연극을 공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국내의 천도교는 신구 양파로 나뉘어 내부 갈등이 극심한 때였다.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도부가 문화운동론을 수용하여 일제의 문화 정치에 호응하자 이에 반발한 구파가 1921년 4월 지방의 교인들을 끌어들여 교회 개혁 운동을 벌였다. 천도교 신구 양파는 이 갈등을 해결하려고 1922년 6월 양파의 화해 교섭을 시도하였고, 이때 구파의 화해 교섭위원으로 선출되었다. 6월 6일 오후 8시에 서울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천도교종의원후원회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천도교가 과거에 시대 부덕의 정책을 사용하여 왔음을 공격하고 장차 시대 합리의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천도교의 장래’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6월 9일 경운동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열린 신구 양파의 화해 교섭 회견에 김봉국(金鳳國)·강창선과 함께 구파 측 교섭위원으로 참여하여 신파 측 교섭위원과 화합 방안을 협의한 뒤 그날 오후 2시 신구파 교인대회를 열고 무교주제·평등협의체 등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해 8월 말 구파 측은 천도교혁신단을 결성하여 신구파 분리를 선언하고 12월 천도교 총부에서 이탈, 별도의 천도교연합교회를 조직하고 그 직후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고려혁명위원회 해외조직부장에 선출되었다. 그해 10월 23일에는 원산천도교청년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천도교와 우리의 신각성’이란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4년 3월 1일 시베리아 천도교도 20명의 이름으로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에 창조파로 참여하여 국민위원회를 조직한 천도교도 신숙(申肅)의 행동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26년 4월 정의부(正義府)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양기탁·현정경(玄正卿)·고활신(高豁信)·오동진(吳東振)과 천도교 혁신파인 고려혁명위원회의 김봉국·이동낙(李東洛), 형평사의 이동구(李東求)·송헌(宋憲) 그리고 러시아에서 온 공산주의자 이규풍(李圭豊)·주진수(朱鎭壽)·최소수(崔素水) 등이 참여하여 지린성(吉林城) 내에서 고려혁명당을 조직하면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인 1954년에는 천도교총부 상임전도사를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대원⋮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