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공사일

孔士一

1883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공사일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전북 김제(金堤)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김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전해산(全海山)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883년경 전라북도 김제군(金堤郡) 백석면(白石面) 송방리(松方里, 현 김제시 청하면 관상리)에서 태어났다. 1909년 당시 27세였기 때문에 1883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곡부(曲阜)이고 고향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9년 8월경에 김광춘(金光春)·김찬경(金贊京) 등과 함께 전해산(全海山) 의병부대의 일원으로서 군자금 모금 등의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을 명분으로 하여 광무황제(고종)의 퇴위를 종용하였다. 이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맺어 내정간섭을 본격화하고 1907년 8월에는 대한제국의 군대해산까지 단행하였다. 이에 국가존망의 위기감을 느낀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해산 군인과 힘을 합하여 정미의병(丁未義兵)을 일으켰다. 특히 1908년 이후 호남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는데, 농사를 짓다가 이 무렵 의병 활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호남의 3대 의병장으로 평가되는 전북 진안(鎭安) 출신의 전해산(본명 전기홍(全基泓))은 1908년 8월 23일 이후 독립적 의병부대인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을 조직하였고, 1908년 말에는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호남동의단은 11개 부대가 연합하되 각자의 지역을 기반으로 20~100명의 소수 정예부대를 활용하는 유격전을 펼쳤다. 전해산 의병부대는 전남에서는 광주·장성·영광·나주, 전북에서는 고창·부안·김제 등지로 흩어져 소규모로 활동하였다. 특히 이들은 각자의 고향을 기반으로 소규모로 움직이면서 ‘해산(海山) 의진’이라 명명하고 지역 거주민들과 연계하여 의병 활동을 벌였다. 전북 김제군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같은 김제군 출신의 김춘경·김광춘 등과 함께 김제군을 위주로 하여 의병 활동을 벌였다. 전해산 의병부대는 각지에서 무장 항일 투쟁과 함께 친일 세력 제거, 항세투쟁(抗稅鬪爭)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전남의 서부 지역인 영광 불갑산, 나주 석문산(石門山), 광주 대치(大峙) 등에서 승전하기도 하였다. 이에 일제는 지역 거점을 기반으로 하는 의병을 토벌하고자 지역 주민들을 학살하고 변장정찰대(變裝偵察隊)를 파견해 전해산 의병부대의 입지를 줄여나갔다. 1908년 12월 나주 고막원(古幕院) 전투에서 선봉장 정원집(鄭元執)이 전사하고, 1909년 4월 하순 영광의 오동치(梧桐峙)와 덕흥(德興)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이때 참전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김제군 일대에 머무르면서 군수물자와 군자금 징수를 위한 활동을 벌여 나갔다. 1909년 8월 27일 동지인 김찬경·김광춘과 함께 김제군 서포면(西浦面) 원기리(院基里, 현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원터)로 가서 김명선(金明先)의 집을 방문해 “우리들은 전해산 의병장의 부하”라고 하면서 총과 무기를 차출하였다. 더불어 군수물자로 사용할 수 있는 옷감인 당목(唐木)과 단의고(單衣袴) 등 4종의 물품을 징수하였다. 이후 그들은 김명선을 대동한 후 서포면 해창리(海倉里, 현 김제시 죽산면 대창리 해창마을)에 위치한 주막에 이르러 음식을 얻었다. 당시 전해산 의병부대는 일본 군경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각 지역의 주막을 거점으로 하여 정보를 취득하였는데 이는 음식을 얻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었다. 민가가 아닌 주막을 거점으로 한 이유는 일본군의 주민들에 대한 보복이 심화되고, 밀정과 일본군의 수색으로 인해 의병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막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일본군의 이동 상황을 파악한 후 의병들의 활동 경로를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부대원들과 함께 대창리의 주막에서 만경군(萬頃郡)의 주막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만경군 남이면(南二面, 현 진봉면) 양지리(良池里)의 주막으로 다시 이동하여 군자금을 차출하였다. 하지만 군자금 차출 과정에서 주변을 수색하던 순사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후 1909년 9월 20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김광춘과 함께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옥고를 겪던 중인 1912년 9월 13일 이른바 ‘특전(特典)’으로 감형되어 1913년 1월 12일 석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혜선⋮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