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반석
金盤石1879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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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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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1879년경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춘산면(春山面) 사미동(思美洞)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늑약 강제 체결로 외교권을 빼앗겼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 당하였고,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로 군대마저 강제해산되었다. 이처럼 나라가 송두리째 무너져갈 때, 1907년 8월 박연백(朴淵伯)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다시 강진수(姜鎭秀)·서주일(徐周一)의 휘하에 들어가 청송(靑松)·의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박연백은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孝仙里) 출신으로 1905년부터 1909년까지 의성 지역에서 의병을 이끈 인물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사방으로 격문(檄文)을 보내 군사를 모집하여, 1906년 의성군 춘산면과 사곡면(舍谷面)의 경계에 위치하는 공산(孔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7월 1일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린 뒤 의성·의흥(義興)·영천(永川)·청송 등지로 이동하면서 일본군을 공략하였다. 1907년 8월 여러 동료 의병과 함께 총을 가지고 안동군 송제동(松蹄洞) 재곡(齋谷)에 사는 김파총(金把摠)의 집으로 들어가 군자금 명목으로 쌀 세 말을 징수하였다. 박연백 부대의 휘하에서 함께 활동한 인물 중 상주 출신 장학이(張鶴伊), 의성 출신 이신산(李新山)·노명이(盧明伊) 등이 있었다. 1907년 10월 7일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입암전투(立巖戰鬪)에도 참여하였다. 경북 영천(永川)의 정용기(鄭鏞基)가 이끄는 산남의진과 합세하여 치른 전투이다. 산남의진은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할 목적으로 강원도 강릉(江陵)으로 북상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본진 선발대 100여 명이 동해안 방향으로 북상하던 중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매현리(梅峴里)에서 진을 쳤다.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 영천수비대가 죽장면 입암리(立岩里)로 들어오면서 원촌(院村) 마을에서 교전을 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정용기 대장을 비롯한 산남의진의 핵심 부장들과 병사들 19명이 전사를 하였다. 박연백의 인솔아래 이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겨우 피신한 뒤 다시 의성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1907년 11월 25일 박연백의 지휘 아래 100여 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의성군사무소와 일경분견소를 습격하였다. 같은 해 12월 23일에는 청송군 월매동(月梅洞)에서, 12월 25일에는 의성군 삼산(三山)면 진목동(眞木洞)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12월에는 이 외에도 의성군 금곡면(金谷面) 노매동(老梅洞), 청송군 화목면(和睦面) 소근리(所斤里), 의성군 춘산면 금동(金洞)·공수동(孔殊洞)·유동(柳洞) 등 청송·의성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접전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1909년 11월 20일 부대가 해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해산 이후 다시 강진수(姜鎭秀)와 서주일(徐周一)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08년 (음)7월 중 경북 의성군 옥산면(玉山面) 광전동(廣田洞)에서 군수금을 징발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의병 활동을 하던 중 붙잡혀 1908년 9월 21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08년 10월 13일 대구공소원에서 원심과 달리 징역 15년이란 중형을 선고받고 다시 상고하였다. 그러나 10월 29일 대심원 형사부에서 상고가 기각되고 공소원의 형 확정으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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