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렬
金璟烈1877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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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77년경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서촌면(西村面) 화천리(貨泉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황해도 북동부에 위치한 곡산군은 주변의 수안군(遂安郡)과 함께 일찍이 천도교가 전파된 지역으로, 천도교 곡산교구는 1914년 대교구제가 실시되면서 수안교구·신계교구와 함께 서흥대교구에 편제되었다. 곡산군의 만세 운동은 3월 3일 천도교 곡산교구의 교훈인 이경섭(李景燮)이 곡산 읍내 원형도(元亨道)의 집에서 이재경(李載景)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시작되었다. 2월 28일 서울에서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인 나용환(羅龍煥)과 홍기조(洪基兆)는 이경섭에게 독립선언서 배포를 부탁하였다. 또한, 이경섭은 천도교 중앙총부의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과장이자 보성사(普成社) 사장인 이종일(李鍾一)로부터 황해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운동을 전개하라는 명을 받았다. 3월 1일 이경섭은 서흥교구의 교구장인 박동주(朴棟周)를 만난 서흥과 해주 지역에 독립선언서 배포를 부탁하였다. 그날 저녁 수안교구의 공선원(共宣員)인 이종숙(李宗淑)의 집에 도착한 이경섭은 안봉하(安鳳河)·김영만(金永萬)·홍석정(洪錫禎) 등 수안교구의 천도교 지도부와 회합하였다. 이경섭은 독립선언서 100여 매와 함께 서울의 3월 1일 만세 시위와 같은 만세 시위를 수안 지역에서도 전개하라는 이종일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이후 곡산으로 간 이경섭은 독립선언서 3매를 이재경에게 주었다. 이재경은 그 가운데 1매는 읍내의 경명문(景明門)에 붙였고, 나머지는 같은 마을의 김응택(金應澤)과 김여원(金礪元)에게 교부하였다. 그리고 김인갑(金寅甲)·강덕근(康德根)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리고 서촌면의 조병하(趙秉夏)와 청계면(淸溪面)의 이병규(李秉奎) 등에게 3월 4일 곡산 읍내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할 계획을 알렸다. 3일 조병하로부터 ‘한국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4일 곡산 읍내에서 만세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이에 적극 찬동하였고, 화천리의 천도교인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에 참가하기로 계획하였다. 이에 만세 시위에 참여할 사람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서촌면 금성리(錦城里)의 천도교 전도실에 있던 독립선언서를 화천리의 게시판에 붙였다. 그리고 동리에 거주하는 천도교인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4일 30여 명의 천도교인들이 모이자 그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의 취지에 관해 설명하고 함께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4일 오전 10시경 이경섭·이재경·김인갑·강덕근·조병하 등 곡산의 천도교 지도부는 50여 명의 천도교인과 함께 ‘조선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과 함께 송항리(松項里)에서 읍내로 행진하는 과정에서 헌병들의 제지를 받았고, 이재경과 김인갑 등 지도부 7명은 헌병분대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에 붙잡혀 4월 1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5월 1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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