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필
權正弼1884. 11. 29 ~ 1939. 3.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해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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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4년 11월 29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송천동 구장으로서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의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병곡면 병곡동(柄谷洞)으로 이동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영덕 지역 3·1운동은 3월 18일 영해 장터에서의 대규모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군내 총 9개 면 가운데 영덕면·남정면(南亭面)·지품면(知品面)·영해면·병곡면·창수면(蒼水面) 등 6개 면에서 일어났다. 영덕의 만세 시위는 경북에서 가장 격렬하였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중에서도 영덕 북부의 영해면·창수면·병곡면의 시위가 가장 강렬하였다. 영덕 지역의 3·1운동은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洛坪洞)의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 조사(助事)였던 김세영(金世榮)을 중심으로 계획·전개되었다. 김세영은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고자 평양으로 가던 중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목격하고 평양 행을 단념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3월 12일 낙평동교회의 구세군 참위로 있던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채택한 까닭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사를 표명하려고 서울·평양·대구 등지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고 있음을 전달하였다. 권태원은 김세영의 권유에 따라 병곡면 송천동의 장로교회 조사인 정규하(丁奎河)를 만나 영해면·병곡면·축산면(丑山面)·창수면의 기독교 및 유림 세력 등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정오 무렵 영해 장터에 모인 2,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오후 1시경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행진을 시작하였고, 영해경찰관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공립심상소학교·영해면사무소·영해우편소 등을 습격하여 기물을 파손하기도 하였다. 한편, 오후 2시경 정규하 등 2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북쪽에 위치한 병곡면의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이에 병곡주재소 일본 경찰들은 강원도 평해(平海, 현재는 경북 소속)의 헌병분견소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병곡면 도착과 함께 4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주재소는 기둥과 지붕만 남기고 대부분 파괴하였으며, 면사무소에서는 유리창 등을 파괴한 후 납세고지서 원부 기타 공문 서류를 파기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시위대와 충돌 끝에 평해와 가까운 백석동(白石洞) 방면으로 도망하였다가 지원 나온 군인들과 합세하여 재차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정규하는 시위대의 희생을 염려하여 군중을 설득하여 오후 7시경 해산하였다. 이후 군경은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인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김세영과 남응하(南應夏) 등 74명과 함께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심문 과정에서 “나는 영해 시장으로 가서 어린아이를 구조하기 위해 군중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 뒤 다수에게 권유를 받아 병곡면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군중과 함께 주재소·면사무소 등으로 몰려가 건물 등을 파괴하였다”라고 진술하였다.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당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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