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준
高熙俊1897. 12. 19 ~ 1951. 1. 1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서울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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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3) 1897년 12월 19일 충청남도 당진군(唐津郡) 마암면(馬岩面, 현 당진시 면천면) 자개리(自開里)에서 출생하였다. 고성봉(高成鳳)이라고도 불렸다. 1919년 당시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培栽高等普通學校)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1919년 3월 1일부터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학우들과 함께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다. 이후 곧바로 만세 시위 행렬에 참여하여 시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면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광화문 쪽으로 행진하였다. 다음 날인 3월 2일에도 종로 보신각 부근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학우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연일 서울 시내의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중 3월 8일 소속 학교의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학생 임창준(林昌俊)으로부터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 33인 명의의 독립선언문 10매와 서울 상인들의 만세 시위 참여를 호소하는 내용의 「시민대회」라는 표제의 유인물 10매를 받았다. 다음 날인 3월 9일 이를 시민들에게 배포하며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3월 23일에도 학우들과 함께 종로로 나가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동대문 방면으로부터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행진해 온 수백 명의 시위대를 만나 합류하여 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날의 시위에서 행진 방향 등을 지시하려고 지니고 있던 손수건을 깃발 삼아 흔들어 시위대를 지휘하였다. 연일 계속된 서울 시내의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3월 27일 단성사 앞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인정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을 이유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으로부터 항소가 기각되어 8개월간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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