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연
權炳淵1882. 7. 30 ~ 1919. 4.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양양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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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82년 7월 30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대산면(大山面, 현 서산시 대산읍) 대죽리(大竹里)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손양면(巽陽面) 간리(間里)로 이주하여 주류 판매업에 종사하였다. 양양 지역은 강원도에서 가장 치열한 만세 시위가 전개된 지역이다. 양양에서의 만세 시위는 3월 말 이석범(李錫範)을 중심으로 한 유림계와 조화벽(趙和璧)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계가 주도하였다. 이석범은 고종 장례식에 참여하러 서울에 올라왔다가 만세 시위를 목도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귀향한 후 자기 아들 이능렬(李能烈)과 자신이 설립한 쌍천학교(雙川學校) 졸업생 김영경(金英經)·장세환(張世煥) 및 양양보통학교 졸업생 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기독교계에서는 개성(開城)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 학생 조화벽이 개성의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3월 말 귀향하여 양양감리교회의 김필선(金弼善) 등 청년들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와 같은 두 갈래의 만세 시위 준비는 양양보통학교의 졸업생인 최인식과 김필선이 서로 연락하면서 합동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들은 4월 4일 양양 장날을 만세 운동 날짜로 정하고 양양군 내의 각 마을에 책임자를 선정하여 구체적으로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4월 3일 유림계에서는 다음 날의 시위를 위해 함평 이씨(咸平李氏) 문중의 이교완(李敎完)·이건충(李建忠) 등의 집에 수십 명이 모여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다. 이때 군수 이동혁(李東赫)과 관헌들이 이건충의 집을 급습하여 이석범을 비롯한 22명을 체포하고 태극기 374매를 압수하였다. 체포를 피한 최인식·김필선 등은 준비 장소를 옮겨 밤새도록 만세 시위를 준비하여 예정대로 양양 장날인 4월 4일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4일 아침부터 인근 지역에서 양양면으로 들어오는 5개의 길목을 따라 각지에서 군중과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서쪽의 임천리(林泉里)로 통하는 길목에서 거마리(車馬里)와 임천리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양양면으로 들어오다가 경찰과 대치하였다. 손양면의 만세 운동 연락자로부터 장날의 만세 시위 계획을 전달받은 상태에서 장사 준비를 위해 일찍 읍내로 들어와 있다가, 조화벽·김필선 등 교회 청년들의 지휘에 따라 100여 명의 주민과 함께 먼저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에 외곽의 길목을 경비하던 경찰들이 모두 양양면에 집중되면서 5개 길목을 따라 많은 주민이 양양면으로 들어왔다. 장터의 곳곳에 운집한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경찰은 일단 경찰서 안으로 철수하였다. 최인식·김필선 등의 지휘에 따라 만세 시위에 참여한 주민과 함께 경찰서 앞으로 가서 이석범 등 전날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하고, 관헌은 자기 나라로 물러가라고 요구하면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오히려 교섭을 위해 경찰서로 들어가는 만세 시위의 주도자들을 모두 체포 감금하였다. 특히 손양면 가평리(柯坪里)의 구장 함홍기(咸鴻基)는 경찰서장실에서 항의하다가 관헌의 칼에 팔이 잘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시위대와 함께 경찰서와 군청을 습격하는 데 참여하였다. 경찰서와 군청을 에워싸고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구해 들고 경찰을 공격하였다. 시위대의 공격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던 경찰은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이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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