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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範洪

範洪

1894. 7. 20 ~ 1919.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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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範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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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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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3)

관련 사건

  • · 1919년 4월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3) 1894년 7월 20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적곡면(赤谷面, 현 장평면) 화산리(花山里)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구성(九星)이라는 이명이 있다.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5~6일 청양군 정산면(定山面)에서 있었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산면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이 주도하였다. 홍범섭은 백곡리의 유림들과 논의하여 면사무소 소재지인 서정리(西亭里) 정산시장의 장날,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장날이자 만세시위의 거사일인 4월 5일, 사전에 유림들의 연락망을 통해 만세시위 계획을 전해 듣고, 이에 공감하여 같은 마을의 이성하(李成夏)와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정산시장으로 향하였다. 오후 3시가 되자, 홍범섭 등은 정산시장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즉시 해산을 명령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하였다. 장날 시장에 나왔다가 평화로운 만세시위의 주도자를 일제 헌병들이 강압적으로 연행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분노한 많은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만세시위대는 체포된 사람들을 대신하여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지휘하였다. 권흥규의 지휘에 따라 7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던 권흥규가 헌병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다른 시위대와 함께 곧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6일 권흥규의 시신 운구를 위해 헌병주재소로 갔다. 권흥규의 친인척과 전날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이면서 운구행렬은 대규모가 되었다. 운구행렬의 선두에는 권영진(權寧鎭)이 쓴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는 명정(銘旌)을 들고, 많은 만장(輓丈)이 줄을 이었다. 운구가 지나가는 각 마을에서도 상여를 대고 또 곳곳에서 노제를 올리고 통곡하며 속속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다. 지곡리(池谷里)를 경유할 즈음 ‘대한독립만세’의 절규가 터져 나오면서 권흥규의 운구행렬은 그 자체로 만세시위가 되었다. 정산의 헌병파견대만으로는 만세시위 제압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일제는 청양군과 인근 공주(公州)의 헌병들까지 정산으로 파견하였다. 공주에서 출동한 일제 헌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운구행렬을 보자마자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여 운구에 선두에 있던 권영진, 권흥규의 조카딸 최윤안(崔胤安), 상여꾼 김국삼(金國三)·유행길(柳行吉) 등 여러 사람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 직후 시위 참여자 색출에 나선 일제 헌병에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1919년 4월 24일의 즉결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의 고초를 겪었다. 즉결심판 이후 불과 8개월 만인 1919년 12월 14일 25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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