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相瓚
相瓚1884. 5. 8 ~ 1942. 1.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영동군 양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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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4년 5월 8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양산면(陽山面) 가곡리(柯谷里)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한학(漢學)을 공부하면서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채연(李彩然)·이관연(李觀然) 등 가문의 친인척들과 함께 1919년 3월 30일 영동군 양산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영동군 양산면 만세운동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양반가문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인천 이씨 가문이 주도하였다. 그리고 양산면 만세운동은 이웃한 학산면(鶴山面)과 연합으로 전개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3월 29일 학산면 학산리(鶴山里)에서 주민 200여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가 있었고 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양산면의 이흥연(李興然)과 이성주(李聖周)가 영향을 받아 ‘대한독립만세’를 큰 글씨로 목판에 써서 길 가에 세워 놓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것이 양산면 만세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3월 30일 인천 이씨 문중의 이흥연·이성주이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채연 등은 서로 협의하여 어린 학생들을 구출하고 동시에 양산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당시 대부분의 주민들이 영동-무주 간 도로공사에 강제 동원되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공사현장으로 가서 주민들에게 어린 학생들의 체포 소식을 전하고 이 학생들처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 도로공사 현장에서 노역을 강제당하고 있었는데, 만세운동의 취지와 구금된 두 학생 구출에 동의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른 2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이채연 등의 지휘에 따라 학산면 서산리(鋤山里) 소재 경찰주재소로 행진하였다. 다른 시위대와 함께 오후 2시경 서산리 경찰주재소 앞에 도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이흥연과 이성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에 대한 습격을 주도하였다. 이채연 등과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다른 주민들에게도 주재소를 공격할 것을 독려하였다. 주재소의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 이흥연과 이성주를 구출하였다. 그리고 주재소 내부의 전화기 등 일제 경찰의 집기와 시설을 파괴하고, 일제 경찰들을 압박하여 그들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 같은 격렬한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는 지원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이로 인해 수십 명의 주민들이 부상당하였고, 이 과정에서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1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10월 1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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