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석
尹昌錫1894. 8. 1 ~ 1966. 8. 2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청년독립단
- ·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 ·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2
- · 8독립선언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4년 8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수신면(修身面) 상지리(上地里)에서 태어났다. 1909년 공주(公州)의 기독교계 사립 영명학교(永明學校) 고등과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수료하였으며, 1912년 배재학당으로 편입하여 1913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을 떠났다.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서 유학하면서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와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4월 13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각 학교연합 웅변회에서 「성공과 희생」이라는 제목으로 희생적 정신이 나라를 흥하게 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1917년 11월의 러시아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그리고 재미 한인들의 독립청원운동,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호소하려는 움직임 등에 자극을 받았다. 1918년 말부터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웅변회·망년회·동서연합웅변회 등 각종 석상에서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논의를 거듭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거주하는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贊鎬)·정한경(鄭漢景)이 민족대표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다는 사실을 알린 일본의 영자신문『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 기사를 유학생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재학 중이던 아오야마학원의 미국인 교수 해리스가 일본 정부의 위촉으로 한국 대표단 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파리로 파견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중지시키려고 하였다. 1919년 1월 6일 학우회 웅변회에서 서춘(徐椿)·이종근(李琮根)·박정식(朴正植)·최근우(崔謹遇)·김상덕(金尙德)·안승한(安承漢)·전영택(田榮澤)·최팔용(崔八鏞)·김철수(金喆壽) 등과 함께 연설을 하며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최팔용·이종근·최근우·김상덕·서춘·전영택·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송계백(宋繼白)과 함께 총 10명의 임시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일본 제국의회 청원서 제출과 한국 대표자의 파리 파견, 결의문을 통한 여론 환기, 유학생들의 동맹 휴교 등 구체적 방안이 정해졌다. 1월 7일에도 논의는 계속되었고 1월 8일에는 200여 명의 유학생이 모였다. 이때 경찰에게 서춘과 함께 주동자로 지목되어 소환되었고 모임은 해산되었다. 이후 전영택은 병으로 사임하고 이광수(李光洙)와 김철수가 추가되어 총 11명의 위원이 활동하게 되었다. 위원들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 및 독립선언서, 결의문 작성 및 인쇄 준비에 나섰다. 국문·일문·영문의 선언서·결의문·청원서가 마련되었고, 선언서에 11명의 위원이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서명을 하였다.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유학생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있고 아오야마학원 학생 9명과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 김마리아(金瑪利亞)가 조선청년독립단에 자금을 전달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일제 경찰에 불려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2월 8일 오전 실행위원들은 준비해 둔 인쇄물을 각국 대사관, 일본 귀족원·중의원 의원, 조선총독부, 도쿄 및 각지의 신문·잡지사, 학자들에게 우송하였다. 그 날 오후 2시 유학생 200~300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인 가운데 학우회 총회가 열렸다. 이때 사회를 맡았고, 백관수가 독립선언서, 김도연이 결의문, 서춘이 청원서를 각각 낭독하였다. 이것이 바로 ‘2·8독립선언’이다. 낭독에 이어 연설이 이어지자 일제 경찰이 해산 명령을 내렸고 학생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현장에 없었던 이광수와 최근우를 제외한 9명의 조선청년독립단원을 포함한 30여 명의 유학생들과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붙잡힌 유학생들과 함께 니시칸다(西神田) 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2월 10일 조선청년독립단원 동지들과 함께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예심을 거치지 않고 공판에 부쳐졌고 2월 13일 방청을 금지한 채 심리가 진행되었다. 2월 15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 9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26일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0년 3월 26일 풀려났으며, 그해 7월 9~20일 동아일보사가 후원하는 제1회 학우회 하기 순회강연단에 참여하여 울산·경주·대구·공주·청주 방면 강연대의 일원으로 각지에서 연설을 하였다. 같은 해 11월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회가 새로 구성되었을 때 채필근(蔡弼近) 등 4명과 함께 종교부 부원을 맡았다. 1922년 4월 아오야마학원 고등인문과를 졸업하였다. 실제 학업은 이미 마쳤으나 2·8독립선언으로 옥고를 겪느라 졸업이 늦어진 것이다. 졸업 후 귀국하여 영명고등보통학교 교유(敎諭) 및 부설 야학영어강습회 강사로 재직하였고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 공주지방부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8년 영명소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광복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의 환국을 맞이하는 전국환영회 교섭부 16인에 이름을 올렸고,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국민의 총의를 모으기 위한 국민대회 준비회 333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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