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康秊
康秊1858. 12. 30 ~ 1908. 9. 1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호좌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대한민국장(1962)
관련 사건
- · 13도창의대진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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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장(1962) 1858년 (음)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군(聞慶郡) 가은면(加恩面) 상괴리(上槐里) 도태(道胎)마을에서 이기태(李起台)와 의령(宜寧) 남씨(南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岡 또는 雲崗)이다. 1879년 6월 무과 병과에 합격한 후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는 등 무관이 되었지만, 갑신정변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제가 의병 탄압 과정에서 작성한 「폭도사편집자료」에 “동학당 봉기 때 그 지방의 수괴로 관군에 대항하여 비상한 참해를 일으켰다”는 기록을 토대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지자 농민군에 가담했다는 설도 있지만, 가담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1894년 청일전쟁,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충북 제천(堤川)에서 유인석(柳麟錫)을 주축으로 의병부대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23일 문경 가은 도태장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해 2월 25일 농암장터에서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을 비롯하여 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 등 세 사람을 생포하여 효수하였다. 2월 27일 문경 고모산성(姑母山城)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인 후 안동(安東)으로 이동하여 의병장 권세연(權世淵)과 연합 활동에 대해 논의하였다. 1896년 3월 12일 제천(堤川)으로 유인석을 찾아가 호좌의병부대 유격장에 임명되었다. 3월 14일 유인석의 명령으로 전군장(前軍將) 홍대석(洪大錫)과 일본군 병참이 있던 수안보를 공격하였지만 점령에는 실패하였다. 3월 26일 중군장 윤기영(尹基榮)과 문경 평천(枰川)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의 이동을 차단시켰다. 같은 해 4월 3일 조령(鳥嶺) 제1관문의 일본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 및 물자 62점을 노획하였으나, 일본군에 포위되어 조령 방어와 수안보(水安堡) 공략에 실패하고 20일 제천으로 부대를 옮겼다. 1896년 5월 23일 선유사 장기렴(張基濂)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격을 받아 거점인 제천성을 잃었다. 같은 해 5월 28일 후군장 신지수(申芝秀)와 야습을 통해 제천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단양(丹陽)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제천의병이 서간도로 이동할 때 후군장으로 유인석을 따라 북상하여 7월 3일 영월(寧越)에 도착하였으나, 관군에 진로가 차단당해 본진에 합류하지 못했다. 이에 소백산에서 의병부대 해산을 선언하고, 단양 금채동(金采洞)에서 은거하다가, 1897년 (음)4월 김상태와 함께 서간도로 가서 유인석을 만나고 (음)7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화서학파 문인들과 교류하며 수학하였다. 1899년 충주(忠州) 병산(屛山)에서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의 문집이 간행될 때 호남을 왕래하며 동문들의 후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재기할때 합류하고자 하였으나 병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1906년 2월까지 강원·충북·경북 일대를 돌아다니며 의병 참여를 호소하였다. 1907년 5월 안성해(安成海) 등과 지평(砥平) 방면에서 의병을 일으켜 횡성(橫城)·원주(原州) 방면으로 진출하여 군인 출신 백남규(白南奎)를 영입하였다. 같은 달 영춘 용소동(龍沼洞)에서 일제 군경과 한인 순검의 공격을 받아 큰 부상을 입었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부대 간의 연합과 연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해산 군인을 주축으로 한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충청도의 주요 거점인 충주성 공략을 계획하였다. 동년 8월 제천-청풍(淸風)을 경유하여 충주 인근에 도착하였으나 민긍호 부대가 합류하지 못하게 되자 부대를 이끌고 충주성을 공략하였지만, 일본군 2개 소대의 완강한 저항에 실패하였다. 충주성 공략에 실패하고 단양을 거쳐 문경으로 이동하면서 일제에 협력한 홍경시(洪慶時), 의병장 원용팔(元容八)을 기만한 김교홍(金敎弘), 일진회원 김상호(金商虎) 등을 처단하였다. 이후 문경으로 남하하여 여주(驪州)에서 내려온 김현구(金賢圭) 의병부대와 합류해 교통의 요충지인 조령을 수비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동년 9월 조령의 관문인 주흘문(主屹門)·모항령(毛項嶺)·갈평(葛平)·대승사(大乘寺)·금룡사(金龍寺)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전면전을 피해 문경 동북쪽의 갈평으로 이동하고 의병을 주요 길목에 배치해 일본군이 갈평에 다다랐을 때 우선봉 백남규, 좌선봉 하한서(河漢瑞), 우군선봉 권용일(權用佾), 도총독장 이만원(李萬源) 등과 일본군을 공격하고 단양으로 북상하였다. 단양에서 이명상(李明相) 부대, 청풍의 조동교(趙東敎) 부대, 삼척지방으로 파견되었던 소모장 원건상(元建常) 부대를 통합하여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이후 영춘(永春)에서 일본군 1개 중대와 교전을 치르고 영월(寧越) 방면으로 북상하던 중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고 영춘으로 돌아와 1907년 10월 영월을 거쳐 제천 송한(松寒)에 일시적으로 주둔하였다. 같은 해 10월 21일 강원도 선유사 홍우석(洪祐晳) 등이 원주에서 주천(酒泉) 방향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유치(上紐峙)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백남규·권용일로 하여금 공격토록 하고 단양을 지나 죽령(竹嶺)으로 남하하였다. 죽령 일대에 주요 의병부대가 집결하자 일본군이 이동해 왔고 같은 해 11월 10일 교전이 벌어졌다. 이후 청량산·일월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신돌석(申乭石) 부대와 연합해 순흥(順興)의 일본군 분견소, 경찰서 등을 격파한 뒤 영춘의 의풍(義豊)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의풍에서 해산군인으로 의병에 합류한 변학기(邊鶴基)를 우군장에 임명하였고, 죽령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1907년 12월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될 때 강원도를 기반으로 하는 이인영(李麟榮) 계열 의병부대와 경기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허위 계열 의병부대 등과 활동하기 위해 북상하였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원철상(元哲常)·이중봉(李重鳳) 등 10여 명의 간부들이 체포되고 다수가 전사하였다. 이후 태백산맥을 따라 평창(平昌)·화천(華川)을 거쳐 1908년 1월 8일 가평(加平) 용소동(龍沼洞)에 이르렀지만, 일본군의 공격으로 13도창의대진소에 합류하지 못하였다. 용소동 부근에 주둔하며 일본군과 산발적으로 교전을 벌이며 합류 기회를 엿보다가 4월 초순 관동지방으로 퇴각하였다. 화천과 인제(麟蹄)를 거쳐 4월 10일 설악산 백담사(百潭寺)로 이동하였고, 4월 13일 추격해온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이후 백담사를 떠나 신흥사(新興寺)·오세암(五歲庵)을 경유해 양양(襄陽)·강릉(江陵) 방면으로 이동한 다음 남하하여 영월 상동의 운기리(雲基里)에서 백남규·권용일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1908년 영남지방으로 내려와 봉화(奉化) 서벽(西壁)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고, 영주 수비대 소속 일본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선봉장 백남규를 비롯하여 권용일·변학기 등에게 일본군이 침입하는 길목에서 공격토록 하였다. 서벽 남쪽의 내성(乃城)으로 진격해 일본군과 교전한 뒤 봉화 재산 방면에서 예안 수비대 소속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908년 6월 28일에는 영월 사자산에서 원주 수비대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잔여 의병을 이끌고 청풍으로 남하해 금수산 기슭의 까치성에 머물던 중, 7월 2일 제천 수비대 소속 일본군의 공격으로 왼쪽 발목에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7월 8일 한국주차군사령부로 이감되어 심문을 받았다. 심문 과정에서 “보고 싶은 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뿐이다. 너희 추한 것들과는 말하지 않겠다”고 저항 의지를 나타냈고, 7월 19일에는 다시 평리원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평리원 판사 박제선(朴齊璿)이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심문할 때에도 “내가 거의한 것은 먼저 오적과 칠적을 단죄하고 왜적을 박멸해 위로 나라의 철천지 원수를 갚고 아래로 도탄에 빠진 생민을 구하고자 함이었다”라는 글로 답하였다. 1908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교형(絞刑)을 받았다. 1908년 (음)9월 19일 큰아들 이승재(李承宰)에게 “네 아비는 평생에 혈충(血衷)을 품어 나라를 위해 죽고자 했다. 이제 뜻대로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랴. 너는 놀래지 말고 정신을 차려 동생과 함께 나 죽은 뒤 삼일 안으로 박장(薄葬)토록 하라”는 내용을, 그리고 전국의 의병에게는 “동지들에게 바라는 것은 적세(賊勢)가 성하다고 해서 본의(本意)를 어기지 마시고 더욱 큰 의리로 매진해 광명한 날을 기다리시라”는 유언을 남기고 오전 10시 교수형을 받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김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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