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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文千

文千

1892. 3. 17 ~ 1941.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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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文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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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齊州)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제주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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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동미회(同味會)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0)

관련 사건

  • · 1919년 제주군 신좌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0) 1892년 3월 17일 전라남도 제주군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잡화상(雜貨商)으로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3월 21일에서 24일까지 4일간 신좌면 조천리 일대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중, 21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천리의 만세운동은 제주 일대에서 명망 있는 유학자(儒學者)이던 김시우(金時宇)의 아들인 김장환(金章煥)이 서울에서 유학하던 중,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3월 16일 경 제주도로 귀향하여 삼촌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과 논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뜻을 함께 할 동지 14명을 모았는데, 이 때 함께 참여하였다. 3월 21일 아침 10시, 인근 지역의 서당 학생 등 150여 명이 신좌면 조천리 미밋동산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앞장서 만세를 외치며 조천 비석거리를 향해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였다.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 500여 명에 달하였다. 일제 헌병들이 급히 출동하여 해산을 권유하였으나 사람들은 이에 저항하였다. 대치 중 일제 경찰이 증원되었고, 이들이 시위대를 강제로 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김시범 등 9명이 붙잡혔는다. 이 때는 몸을 피하였다. 이어진 22일에도 조천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있었으나, 이때는 미처 참여하지 못하였고, 이어진 23일에는 김연배(金年培)·백응선(白膺善)과 함께 100여 명의 시위대를 모아 조천장터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후 사람들에게 함덕리(咸德里) 방면으로 진출할 것을 역설하며 사람들을 이끌고 함덕리로 행진하였다. 이곳에서 주민들과 합류하여 800여 명의 큰 무리가 되어 더욱 열성으로 시위를 주도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여 총칼을 이용하여 강제 해산을 요구할 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 조천리 시위 주도자 14명이 감옥에서 받은 돈을 모아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에 사용하기로 결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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