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鳳然
鳳然1893. 10. 16 ~ 1941. 8.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동군 학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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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3년 10월 16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양산면(陽山面) 가곡리(柯谷里)의 인천 이씨(仁川) (李氏) 양반가에서 출생하였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이채연(李彩然)·이관연(李觀然)·이헌주(李憲周)·이진국(李鎭國)·이상찬(李相瓚) 등 문중의 친인척들과 함께 1919년 3월 30일 학산면(鶴山面)에서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영동군 양산면의 만세운동은 이웃한 학산면과 연합하여 전개되었는데, 인천 이씨 문중이 만세시위의 중심 세력이었다. 만세시위는 학산면에서 먼저 일어났다. 3월 29일 학산리(鶴山里)의 주민 2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관공서를 공격하는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만세시위는 곧바로 양산면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양산면의 보통학교 학생 이흥연(李興然)과 이성주(李聖周)는 이날 학산면의 만세시위로부터 자극받아 큰 글씨로 ‘독립만세’라고 쓴 목판을 큰 길에 세워 놓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흥연과 이성주의 체포는 양산면 만세시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양산면과 학산면의 연합 만세시위의 근본 배경에는 이 지역 주민들에 대한 일제의 노동력 강제동원과 관련된 문제가 있었다. 일제는 주민들에게 뽕나무 묘목을 강제 배부함과 더불어 소백산맥(小白山脈)과 금강(錦江)을 가로지르는 험준한 산악지대인 영동과 전북 무주(茂朱)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도로 공사에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이러한 강제 동원으로 주민들은 사망·부상 등의 위험으로 일상이 위협받고 있었고, 두 학생의 체포로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만세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3월 30일 이흥연과 이성주의 체포 소식을 접한 이채연·이관연·이헌주 등은 서로 협의하여 어린 학생들을 구출하는 것과 함께 양산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당시 마을주민 대다수가 영동-무주 간 도로 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공사 현장으로 가서 주민들을 설득하여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도로 공사 현장에 동원되어 일하다가 이채연·이관연 등으로부터 학산면 서산리(鋤山里)의 경찰주재소로 다같이 가서 구금된 두 학생을 구출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는 호소를 들었다. 이에 크게 공감하여 공사 현장에 함께 동원된 2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시위 대열에 참여하였다. 이채연·이관연·이헌주 등의 지휘에 따라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경찰주재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오후 2시경 경찰주재소 앞에 도착해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이흥연과 이성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이 두 학생의 석방을 거부하였고, 이에 분노하여 경찰주재소 공격을 주도하였다. 이채연·이헌주·이광연(李光然)·이관연·이진국(李鎭國)·이상찬(李相瓚)·이낙연(李洛然) 등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서 돌을 던져 주재소의 유리창을 부수고, 다른 주민들의 주재소 공격을 독려하였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이흥연과 이성주를 구출하였다. 또한 주재소 내부의 전화기 등 일제 경찰의 집기들을 파괴하고, 다수 시위대의 위세로 일제 경찰들을 압박해 ‘독립만세’를 따라 부르게 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제는 인근 지역에서 지원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를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이 부상당하였고, 이상찬·이진국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1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상고를 포기함에 따라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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