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康熙
康熙1898. 2. 17 ~ 1943. 3. 1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유호학생회
- · 대한민국임시의정원
- · 부산청년동맹
- · 신간회 부산지회
- · ㄱ당(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8년 2월 17일 경상남도 부산부(釜山府) 초량동(草梁洞)에서 태어났다. 중국으로 건너가 펑톈성(奉天省) 장백부(長白府)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중국 지역 한인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부산지역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1918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이동하였으며, 1919년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에서 의원을 설립하고 간호원 양성을 목적으로 회원을 모집할 당시 십자대(十字隊) 대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12월 23일 당시 유호학생회(留滬學生會) 회장 자격으로 상하이 삼일예배당(三一禮拜堂)에서 윤해(尹海) 등을 초청하여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이 연설회에서 “대한독립운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후의 1인까지 싸우자”는 주요섭(朱耀燮)의 연설이 끝난 뒤 “내외 청년들에게 중국 유학을 진흥 장려시킬 방책을 마련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내 동포 부형에게 선전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1921년 말 이동휘(李東輝)가 이끄는 상해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5월 새롭게 재구성된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회(國民代表大會籌備委員會) 국내특파원으로 임명되었다. 국민대표대회는 국내외 전체 독립운동단체들의 대표가 모여 독립운동 방법과 임시정부 문제를 논의 결정하기 위한 개최되었다. 같은 해 7월 25일 호강대학(滬江大學) 재학 중 상해학생축구단 선발대로 서울에 도착하여 국내특파원으로 국민대표대회 참가 대표를 협의하였다. 1923년 4월 4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경상도 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귀향하여 1923년 6월 부산 『시대일보』 지국기자, 잡지 『자력(自力)』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1927년 7월 개최된 신간회 부산지회 발기준비위원회에서 상무간사로 선출되었다. 그해 11월 6일 개최된 부산청년회(釜山靑年會) 정기총회에서 부산청년단체 합동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2월 4일 부산청년회 등 4개 청년단체가 참가한 부산청년단체합동대회에서 부산청년동맹(釜山靑年同盟)이 창립될 때 교양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2월 4~5일 경남기자동맹(慶南記者同盟)이 주최한 경남기자대회와 경남기자동맹 제1회 정기대회에서 부산본부 간사로 선출되었다. 1928년 3월 3일 부산노우회(釜山勞友會) 위원회에 참석하여 경과보고를 하였으며, 다음날인 3월 4일 부산청년동맹 임시위원회에서 임시의장으로 노동자공동숙박소와 부산소비조합 등의 설립을 촉진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3월 24일 부산협동조합 창립대회에서 “조선 사람의 일용품을 공급 수용키 위한” 목적의 협동조합 준비 과정에 대한 경과 보고를 하였다. 4월 21일 부산청년동맹 제1회 정기총회에서 임시의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지역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1928년 초부터 정태봉(鄭太鳳)·장태봉(張太鳳) 등과 신간회와 같은 합법 활동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중국 광동군관학교(廣東軍官學校)에 청년들을 입교시키고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목적을 가지고 비밀결사 당(黨)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비밀결사의 내부조직 강화와 한국 정세의 연구, 동지 규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6월 19일 이 일로 서울 계동(桂洞) 자력잡지사에서 붙잡혀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 해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929년 6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으며, 1930년 12월 28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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