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吉用
吉用1899. 8. 15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인배회
- · 제물포청년회
- · 조선청년총동맹
- · 조선운동기자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9년 8월 15일 경기도 인천부(仁川府) 부내면(府內面) 우각리(牛角里, 현 인천광역시 동구 창영동)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이다. 사립 영화학교(永化學校)와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에 진학하였으나 1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철도원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만세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반일 격문을 배포하고자 하였으나,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1년에 풀려난 후 대전(大田)에서 청년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8월 10일 대전청년구락부(大田靑年俱樂部) 제3회 정기총회에서 문예부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 대전청년회(大田靑年會) 문예단 단장으로 10여 명의 단원과 함께 남부 지방을 순회하며 각 지역 청년회와 교류하였으며, 대전에서 「운강명월」이라는 극을 공연하였다. 1923년 2월 대전소작인상조회(大田小作人相助會) 총회에 대전물산장려회(大田物産獎勵會) 회장으로 참석하여 소작인들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열변을 토하였다. 또한 그 해 3월 대전체육회(大田體育會) 창립총회에서 서무 겸 연구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동아일보』 대전지국 기자로 근무하였다. 1923년 인천으로 지역을 옮겨 청년운동을 지속하였다. 같은 해 9월 인천지역 배재학당 졸업생 모임인 인배회(仁培會)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1월 제물포청년회(濟物浦靑年會)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이 무렵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총회에 참석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인천지역의 정구 경기에서 심판을 보고, 빙상경기대회 개최를 주도하여 스포츠 분야에서도 활동하였다. 또한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활동하며, 1923년 8월 굴업도(堀業島) 태풍 피해 당시 현장으로 출동하여 르포 기사를 전달하였으며, 이후에도 각종 재난 현장에서 신속히 소식을 전하였다. 1924년 『조선일보』로 옮겼으나, 1927년 다시 『동아일보』 기자로 복귀하였다. 이 무렵 체육 전문기자로 활동하였다. 그 이유는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한국의 혼을 찾고자 한다면 체육을 중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 경기 현장을 취재하면서 한국인 선수들의 활약상을 보도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또한 1927년 8월 다른 신문사 기자들과 함께 조선운동기자단(朝鮮運動記者團)을 조직하여 스포츠보도 전문화에 기여하였다. 1936년 8월 25일 손기정(孫基禎)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소식을 보도하면서 일장기를 말소하였다. 당시 『동아일보』 미술담당 기자였던 화가 이상범(李象範)에게 일장기 말소를 요청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창당에 참여하여 조직부 차장을 맡았다. 1945년 『동아일보』 복간과 더불어 사업부 차장으로 복귀하였다.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구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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