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太乙
太乙1908. 11. 16 ~ 1949. 7. 1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영양청년동맹 석보지부
- · 신간회 영양지회
- · 공작위원회(영덕
- · 영양그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양격문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8년 11월 16일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 원리동(院里洞)에서 아버지 이현철(李鉉喆)과 어머니 한양 조씨(漢陽 趙氏)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재령(載寧)이며, 자는 명천(命天), 이명은 이명호(李命浩)이다. 안동 김씨(安東 金氏) 김남성(金南星)과 결혼하여 1남을 두었다. 1927년 3월 경북 석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고향 석보면 두들마을로 불리는 원리동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동과 지역민을 위해 노동야학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또한 청년운동을 전개하면서 1928년 12월 창립된 영양청년동맹(英陽靑年同盟) 석보지부(石保支部)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중외일보 영양지국을 운영하면서 신간회(新幹會) 영양지회에 가입하였으며, 1929년 8월부터 신간회 영양지부 집행위원 후보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1930년 2월 8일 영양청년동맹 석보지부 회관에서 청년운동과 신간회 활동을 함께 펼치던 이돌몽(李乭蒙)·박주억(朴周億)·박수봉(朴壽奉) 등과 함께 시국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대응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일제의 지배가 민족을 억압하여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광주학생운동도 일제가 한국인 학생만을 탄압하여 전국의 학생과 민중이 함께 궐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 사건이라는 인식을 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석보면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벌여 뜻을 함께 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1930년 2월 11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석보면 원리동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탄압을 규탄하고 광주학생운동의 진상과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내용의 격문 800여 장을 인쇄하여 거사 당일에 배포하기로 결정하였다. 계획대로 2월 11일 장터에서 400~500여 명의 군중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조선의 민족해방 만세’, ‘세계무산자 만세’, ‘광주학생 만세’ 등을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를 탄압하는 일제 경찰에 맞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30년 4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출판법 위반 및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1931년 9월 영양청년동맹의 간부를 지낸 남낙진(南洛鎭)의 권유로 비밀결사인 공작위원회(工作委員會, 일명 영덕·영양그룹)에 가입하였다. 공작위원회는 1928년 조선공산당이 해체된 후 일제 타도와 사회제도 개혁을 위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영덕 출신 이기석의 주도로 영덕과 영양의 청년단체·신간회 간부로 활동했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다. 가입 후 계(契) 형태의 모임을 만들어 동지를 규합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1932년 10월 다시 붙잡혔다. 1933년 11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34년 10월 16일 풀러난 이후 독립운동을 모색하기 위하여 만주로 이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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