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聖瑞
聖瑞1856. 7. 19 ~ 1909. 12. 1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정재학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정재학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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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56년 7월 19일 경기도 지평군(砥平郡, 현 양평군) 북면(北面) 양곡리(楊谷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서울 중부(中部) 소립동(小笠洞)에 거주하면서, 건축업(미장이)에 종사하였다. 이명은 이성서(李聖西), 이성손(李聖孫)이다. 정재학(鄭在學)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한 광무황제(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으로 다시 의병이 전국적으로 궐기할 때, 의병장 정재학 의병부대에 합류해 의병 8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적성군(積城郡)·마전군(麻田郡)·삭녕군(朔寧郡)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음)8월 1일에는 경기도 적성군에서 마전군으로 이동하다가 붙잡은 일본인 약장수 1명을 의병장의 명령을 받고 처단하였다. (음)8월 초순에는 동료 신중원(申仲元) 등과 함께 삭녕군 읍내에서 총 30정·탄약 500근과 군자금 160원 등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15세인 장남 이창준(李昌俊)과 함께 황해도 토산군(兎山郡) 토산시장에서 220원을 군자금으로 모집하고, 군청의 이방(吏房)으로부터 탄약 1상자와 탄환 약 3,000발을 징발하였다. 이후 김원묵(金元黙) 등과 함께 허위(許蔿) 의병부대에 들어가서 경기도 포천(抱川)·연천(漣川)·양주(楊州)·영평(永平, 현 포천시), 황해도 토산(兎山) 등의 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09년 11월 1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았고, 함께 활동한 아들 이창준은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12월 14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자, 자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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