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910 ~ 194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 · 남화한인청년연맹
- · 조선의용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2)
관련 사건
- · 육삼정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2) 1910년 충청남도 출신이다. 본명은 이이덕(李二德)이며, 이명은 이덕(李德) 또는 송일주(宋一舟)라고도 하였다. 강춘(江春)·금월(今月)·달(達)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중국인 아내 진쟈오졔(靳皎潔)와의 사이에 딸 이소심(李素林)과 아들 이중지(李重之)를 두었다. 1929년 7월 북만주 하이린(海林)에서 아나키즘 운동 단체인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및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1월 김좌진(金佐鎭)의 명령으로 이강훈(李康勳)과 일본 군용 열차 폭파를 시도하였다. 이 무렵 한족총연합회의 표현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한농민당(新韓農民黨)의 책임비서를 맡았으나, 1930년 1월 김좌진 피살, 1931년 7월 김종진(金宗鎭, 김좌진의 종제) 피살 등으로 조직이 붕괴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난 후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해 11월 상하이(上海)에서 오면직(吳冕稙)·이강훈·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일본요리점 육삼정(六三亭)을 습격하여 주중 일본대사인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처단하려는 계획인 ‘육삼정 의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던 백정기·이강훈·원심창이 붙잡혀 좌절되었다. 이후 난상(南翔)에 있는 입달학원(入達學院)에서 농촌교육과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남화통신(南華通信)』의 주요 필자로 활동하며, 「동지 엄순봉(嚴舜奉)을 곡(哭)함」(1권 11기, 1936. 12) 등을 발표하였다. 또 『흑색신문(黑色新聞)』에 ‘금월(今月)’이라는 필명으로 아나키즘의 윤리를 밝힌 「동물의 공동성과 사회의 연대성」(31호, 1934. 8. 29), 「인간적 욕구와 지도이론의 불필요」(33호, 1934. 10. 24), 「재중국 조선 민족주의운동의 객관적 해부」(34호, 1934. 12. 28), 「관념이란 무엇인가?」(35호, 1935. 2. 1) 등을 발표하였다. 일제의 중국 침략이 격화되는 상황 등을 배경으로 중국 관내지역에서 활동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37년 6월 상하이 중국인 거리에서 잠복하여 활동하였으며,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여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에 가입하였다. 조선혁명자연맹 중앙위원으로 유자명(柳子明)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및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후 피난 과정에서는 창사(長沙)에서 소학교를 개설하여 한인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 1938년 10월 10일 우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될 때 제2구대 대원에 편성되었다. 이후 자료실 주임 등으로 활동하며 기관선전지인 『조선의용대(통신)』에 조선의용대의 항일활동 및 조선혁명·국제정세 등에 관한 글을 발표하며, 조선의용대 뿐만 아니라 이 시기 중국 관내지역 좌파 민족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하였다. 1941년 10월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에 당선되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옌안(延安)의 중국공산당 항일근거지로 이동한 뒤, 1942년 충칭 잔류병력이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재편되면서 제1지대 비서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충칭에서 후두암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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