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斗勳
斗勳1856. 3. 18 ~ 1918. 3.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5)
관련 사건
- · 을사오적 처단 상소
- · 고령 국채보상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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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5) 1856년 3월 18일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고령면(高靈面) 본관리(本館里)의 성산 이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초명은 이중훈(李中勳), 자(字)는 대형(大衡), 호(號)는 홍와(弘窩)이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적 자질이 뛰어나 12세에 고령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1875년 경북 성주(星州)에 근거를 두고 있던 당대 대표적인 유학자 이진상(李震相)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하였다. 이진상의 제자 중 특별히 뛰어난 제자를 일컫는 ‘주문팔현(洲門八賢)’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까지 단행되자, 이듬해 2월 함께 수학하던 곽종석(郭鍾錫)·윤주하(尹冑夏)·이승희(李承熙) 등과 함께 상경하여 을미사변을 성토하고 단발령 철회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지어 올렸다. 이어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의 초안을 작성해 동문들과 함께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 등의 각국 공사관에 보냈다. 일제의 침략 만행을 비판하고 한국이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지닌 나라임을 강조하면서 국제적 차원에서의 제재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고령으로 돌아온 후에는 내산리(乃山里)에 내산서당(乃山書堂)을 짓고 은거하며 후학 양성과 저술활동에 매진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 해 12월 이승희·장석영(張錫英) 등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䟽)」를 올려 을사오적의 처단과 늑약 파기를 호소하였다. 1907년 1월 말 대구(大邱) 광문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고령지역에서도 유림들을 중심으로 단연상채회(斷煙償債會) 조직이 추진되었다. 고령향교 향약회를 중심으로 발기회가 개최되었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지역 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관내 각면에 공함을 보내 의연금 모금을 지시하고 장문의 소모문(召募文) 작성해 지역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호소하였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만주 망명을 준비하기도 하였으나, 먼저 망명하였던 이승희가 펑톈(奉天)에서 작고하자 뜻을 접었다. 만년에는 『동화세기(東華世紀)』를 통해 자주적 입장에서 단군에서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연대기별로 정리하였다. 그 외에 세거지인 고령의 사료를 정리하여 지방지 『고령지(高靈誌)』를 저술하는 등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승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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