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茂榮
茂榮1921. 2. 28 ~ 1950. 6.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연구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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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5) 1921년 2월 28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가음면(佳音面) 장동(長洞)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영가태웅(永佳泰雄)으로 고쳤다. 1941년 3월 대구사범학교(大丘師範學校) 심상과(尋常科)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 조선공립국민학교(朝鮮公立國民學校) 교원으로서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소재 재산공립국민학교(才山公立國民學校)에서 근무하였다. 1941년 1월 23일 대구부(大邱府) 동운정(東雲町, 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자택에서 대구사범학교 재학생 임병찬(林炳讚)·장세파(張世播)·이태길(李泰吉)·안진강(安津江)·김영복(金榮宓) 등과 만나 시국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회합에서 세계정세를 고려하면 한반도는 머지않아 독립할 것이므로 학술연구에 매진하여 한반도 독립에 노력하기로 하였다. 회합에 참석한 학생들과 함께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연구회는 총 9개 부서로 구성되었다. 이때 전기과학부 책임에 선임되었다. 연구회 회원들은 매달 1회 담당 부문의 연구사항을 발표하기로 하였고, 각 부서 책임자는 하급생을 지도하여 동지로 규합시킨다는 운영방침을 정하였다. 1941년 1월 하순부터 3월 초순까지 윤영석(尹永碩)·이원호(李元鎬)·오용수(吳龍洙)·박제민(朴濟敏)·양명복(梁命福) 등이 가입했으며, 조직 부서는 14개로 늘어났다. 또한 대구의 다른 중등학교 학생들과 접촉하여 조직 확대를 시도하였다. 연구회에서는 조직이 결성된 직후부터 1941년 3월 중순까지 정기적인 발표회를 열어 연구회 회원 각자가 담당한 전공 분야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발표의 주요 내용은 세계정세와 일제의 패전, 한반도 독립에 대한 전망 등이었다. 연구회 회원들은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을 비롯한 지배정책의 본질을 설명하고 민족의식을 고양했고, 일제의 패망과 한반도의 독립이 머지않았음을 교육하면서 학생의 민족적 자각을 촉구하였다. 또한 민족차별의 부당성을 교육하였으며 학생뿐만 아니라 학교 주변의 한국인들에게도 민족의 역사를 설명하였다. 재산공립국민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던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1년 10월 28일 「문관징계령(文官懲戒令)」에 따라 교원에서 해임당하였다. 1943년 2월 8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예심을 마치고 재판에 넘겨졌다. 같은 해 11월 30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1944년 3월 2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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