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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晩燾

晩燾

1842. 1. 28 ~ 1910.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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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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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순흥(順興)계몽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순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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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선성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전기의병(선성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42년 1월 28일 경상북도 순흥부(順興府) 난곡리(蘭曲里,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에서 복재(復齋) 이휘준(李彙濬)과 야성 송씨(冶城宋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이다. 직재(直齋)라는 별호도 사용하였다. 이황의 11대 손으로 명문가 출신이었다. 7세 때 계부(季父) 이휘철(李彙澈)에게 양자로 갔다. 15세에는 생부를 따라 진성 이씨 문중마을인 예안군(禮安郡) 의동면(宜東面) 하계리(下溪里, 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 이휘준과 족형(族兄) 이만각(李晩慤)에게서 퇴계학을 전수받았다. 1859년 봉화군(奉化郡) 유곡리(酉谷里) 닭실마을 안동 권씨와 결혼하였다. 이후 장인 권승하(權承夏)와 장인의 아우 권연하(權璉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6년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병조좌랑(兵曹佐郎),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修撰), 응교(應敎) 등 청요직과 남학, 중학 교수 등의 학관직을 거쳤으며, 1869년에는 시독관(侍讀官)으로 경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873년 11월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를 변호했다가 일시 면직되기도 했으나, 이듬해 사간원 사간(司諫)에 다시 임명되어 중앙의 주요 요직을 거쳤다. 1876년 처음으로 지방직인 양산군수(梁山郡守)에 임명되어 3여 년간 봉직하였다. 이 기간 동안 굶주린 사람과 이재민 구휼에 힘쓰는 등 선정을 베풀어 인심을 얻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중앙 관직에 진출하여 사헌부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였고,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1882년 4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 거주하면서 1893년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열고 독서와 강학 등 학문 활동에 전념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 소식을 접하고는 “의거를 일으켜 복수하지도 못하고, 상례를 치를 여지조차 없으니, 어찌 나라가 망한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라며 통탄하였다. 이어서 그해 11월 단발령까지 강제로 시행되자, 1896년 1월 23일 선성(宣城) 의병부대 결성에 관여하였으며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일대에서 이중린(李中麟) 등과 함께 의병을 결성하였다. 선성의병부대는 부장을 맡은 이중린 등 주로 진안이씨 문중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러나 인근 지역의 안동 의병부대가 관군과 맞서 싸우다가 크게 패했다는 소식과 함께 고종의 해산 유지(諭旨)가 내려오자 결성된 지 9일 만인 2월 1일 해산을 결정하였다. 이후 1896년 말 고향으로 들어간 뒤 백동서당을 오가며 죄인을 자처하면서 은거의 시간을 보내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을사오적의 처단과 조약 파기를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즉, 을사오적의 죄상을 맹렬하게 성토하여 이들을 단죄할 것을 역설한 뒤, 이어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만국공법에 의거해서라도 이를 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답을 얻지 못하자 “부친의 무덤 아래에서 생매장 당함이 마땅하다”며 절규하였다. 1910년 9월 8일 경술국치 소식을 전해 듣고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이후 14일 동안 부모의 묘소에 찾아가 통곡하였고, 주변의 권유로 거처를 재종손 이강호(李綱鎬)의 집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단식을 시작하였으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에 목숨을 바치는 것은 내가 받은 가르침인데, 이제야 때를 만났다”며 강행하였다. 결국 24일간의 단식 끝에 그해 10월 24일 사망하였다. 생전에 자신의 시문을 편차(編次)해 놓은 『인출편(訒出編)』 20책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향산집』(전 14책)이 일차 간행되었으나 일제가 서책을 압수하고 목판을 훼손하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가 1933년에 다시 간행되었다. 이러한 시문류 외에 1866년 출사 이래 1903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38년 동안 기록한 일기류는 『향산일기(響山日記)』라는 서명으로 1985년 간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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