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錫俊
錫俊1870. 4. 25 ~ 1946. 4.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관련 사건
- · 양주군 미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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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5) 1870년 4월 25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미금면(渼金面) 평내리(坪內里, 현 남양주시 평내동)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3일에서 14일까지의 미금면 평내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미금면 평내리 만세운동은 양주군 최초의 만세시위로, 1919년 3월 13일에서 14일까지 2일 간 전개되었다. 3월 1일 이래 지속적으로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만세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행정망을 통해 전국에 「고유문(告諭文)」을 배포하였다. 평소 독립을 희망하던 평내리의 마을 구장 이승익(李昇翼)은 조선총독 명의의 「고유문」을 전달받자, 이를 오히려 만세운동의 계기로 이용하였다. 「고유문」의 내용을 알린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평내리 소재의 한 주막으로 소집하였다. 구장의 소집에 응하여 정기섭(丁基燮)·우보현(禹輔鉉)·김영하(金永夏) 등 100여 명의 마을 주민들과 함께 주막으로 갔다. 주민들이 모이자, 이승익은 “주민들은 쓸데없는 유언비어에 열중하여 되지도 않은 일에 광분하지 말라. 일본제국은 전승국이므로 한국의 통치에 관해서는 조금도 변경의 여지가 없다”라는 내용의 「고유문」을 낭독하였다. 정기섭·우보현·김영하 등과 함께 구장의 「고유문」 대독에 야유를 보내고, “우리는 만세를 부릅시다”라고 주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크게 공감한 100여 명의 주민들이 다같이 ‘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쳤다. 구장 이승익은 자신이 예상한대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곧바로 주민들의 선두에서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는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3월 14일 이승익·정기섭·우보현·김영하·이보영(李輔永) 등과 함께 150여 명의 주민들을 지휘하여 평내리에서 한 차례 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금곡리(金谷里)의 면사무소를 향해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행진하였다. 만세 행진 도중 일본인 도비타 린키치(飛田林吉)가 시위대를 가로막고 해산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이승익 등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하여 행진을 계속하였다. 도비타의 신고로 출동한 일제 헌병대의 폭력적 진압에 의해 만세시위는 강제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익·정기섭·우보현·김영하 등과 함께 일제 헌병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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