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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達

承達

1898. 2. 2 ~ 1956.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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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承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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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舒川)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서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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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서천군 마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8년 2월 2일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 한산면(韓山面) 송곡리(松谷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9일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장터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9일 서천군 마사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에서 펼쳐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마산면의 만세운동은 기독교계 한영학교 출신인 송기면(宋箕勉) 등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송기면은 3월 중순 경부터 유성열(劉性烈)·이근호(李根浩)·임학규(林學圭)·송여직(宋汝直)·이동홍(李東洪)·노형래(盧亨來)·하중호(河重鎬)·유일동(劉一童) 등과 함께 신장리장터의 장날인 3월 29일을 만세시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를 위해 3월 23일부터 27일까지 송기면의 자택에서 태극기 200장을 제작하는 등 구체적인 준비를 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9일 오전 11시 경부터 송기면 등의 주도자들은 신장리장터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장터의 한복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송여직이 “우리 조선이 자주 독립하여 자유를 향유하고 장래의 안락을 도모한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라고 연설하여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호응을 얻었다. 장터에서 이러한 연설과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을 듣고, 크게 공감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이어서 송기면 등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의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였다. 이처럼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 경찰들이 즉각 출동하여 해산할 것을 강요하였다. 일제 경찰은 강제 해산을 위해 주도자인 송기면·송여직·유성열 등을 마을의 경찰관출장소로 연행하였다.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남아있던 이근호와 나상준(羅相俊)의 지휘에 따라 출장소 앞으로 가서 구금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일제 경찰은 다시 이근호와 나상준마저 체포하면서 시위대의 해산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일제 경찰의 횡포는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2,000여 명의 시위대를 더욱 분노케 하였다. 박재엽(朴在燁)·이동홍·고시상(高時相)·양재흥(梁在興)·김인두(金印斗) 등과 더불어 시위대를 지휘하였다. 이들 시위대와 함께 출장소로 진입해 내부의 책상과 의자, 건물 벽과 천장, 미닫이문과 창문·유리창 등을 파괴하였다. 또한 시위대와 함께 일제 경찰에게 돌을 던지는 등 공격을 지속하면서 구금된 인사들을 탈출시켰다. 이때 시위대의 뒤쪽에서 “붙잡힌 사람들을 탈출시키지 못하면 물러나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며 강하게 독려하였다. 이후 만세시위 참여자 색출을 위해 출동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서천경찰서로 연행되었고, 조사 이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지만, 7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다시 징역 3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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