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允先
允先1862 ~ 1909. 5.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양회일 의병부대
- · 호남창의소
- · 안규홍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3)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용문면(龍門面) 대교촌(大橋村)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62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윤선(允先)이며, 호는 성재(省齋)이다. 본명은 이백래(李白來)이고, 이명은 이웅래(李雄來)이다. 어려서는 보성에서 지냈고, 자라서는 동생 이옥래(李玉來)와 장질(長姪) 이용식(李容植)을 대동하고 상경해 살았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을 사사(師事)하였으며, 학문에 열중하면서도 충절을 중히 여긴다는 평을 받았다. 동향인 이기(李沂)·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위국제민(爲國濟民)의 도(道)와 화이(華夷) 및 사정(邪正)을 논변하였다. 1906년 4월 최익현과 임병찬(林炳贊) 등이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통해 의병봉기를 선언하자, 조카를 보내어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일이 급하니 능주(綾州, 현 전남 화순군)의 쌍봉사(雙峰寺)에서 후일에 거병하는 것이 좋다”고 진언하기도 하였다. 또한 1906년부터 나인영·오기호·박대하(朴大夏) 등과 을사5적 처단을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이때 동생 이옥래는 6조 중 제3조에 소속되어 이홍래(李鴻來)·강원상(康元相)·신태환(申泰焕)·류태경(柳泰京)·박용계(朴用溪) 등과 같이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저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권중현이 거주하는 서울 사동(寺洞)에 은신하며 거사를 준비하다가 붙잡히면서 거사가 실패하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능주로 피신하였다. 능주에서 1907년 3월 9일 양회일(梁會一)이 조직한 쌍산(雙山)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양회일은 전남 능주(綾州) 출신으로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으로 시문에 뛰어나고 충성심이 두드러져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은 인물이었다. 양회일은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전남 화순군(和順郡) 이양면(梨陽面) 증리(甑里)를 중심으로 한 쌍산에서 임창모(林昌模)·양열묵(梁烈默)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양회일은 1907년 1월 19일 ‘격고문(檄告文)’을 발표하여 의병봉기의 당위성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준비를 거쳐 1907년 3월에 양회일을 대장으로 한 쌍산 의병부대가 조직되었다. 쌍산 부대에는 대장 양회일을 비롯하여 부장 신재의(辛在義), 선봉장 이광선(李光善), 중군장 임창모(林昌模), 후군장 노응현(盧應玄), 도포장 유화국(柳化國), 총무 양열묵(梁烈黙), 호군장(犒軍將) 임노복(林魯福), 서기 이병화(李秉華), 군의 전신묵(全信黙) 등의 간부들이 있었고 병력은 약 200여 명 규모였다. 양회일 의병부대와 더불어 1907년 (음)3월 9일 능주의 관아·일본 헌병분견소·세무서 등을 습격해 무기와 총탄을 획득하였다. 같은 해 (음)3월 10일에는 화순을 공격하여 군아와 분견소를 습격하고, 전주와 전선을 자르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동복면(同福面)으로 나아가 그길로 광주(光州)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나, 광주로 가기 위한 길목인 도매치(都埋峙)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크게 패하여 양회일을 비롯한 수뇌부들의 상당수가 붙잡히고 의병부대는 해산되었다. 이때 붙잡혀 1907년 7월 4일 내란죄로 유형(流刑) 10년을 받고 전남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3일 방면(放免)되었다. 풀려난 이후 재기를 노리며 능주로 돌아와 다시 의병을 모집한 끝에 1908년 1월 21일 심남일(沈南一)·임창모 등과 함께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결성하였다. 호남창의소에서 도대장(都大將)에 추대되었으며, 이웃한 보성(寶城)의 안규홍(安圭洪)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장흥(長興)·강진(康津)·흥양(興陽)·보성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호남창의소는 유생이나 전직 관료출신보다 농민층이 대부분이었고 특히 동학당이나 영학당 출신들이 부서의 책임을 맡고 중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의료진을 갖추는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호남창의소는 1908년 (음)1월 8일 장흥경찰서 습격을 시작으로, 같은 해 2월 21일에는 안규홍 의병부대와 공동으로 다시 장흥경찰서를 습격하였다. 그해 9월 20일에는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보성 복내(福內)의 헌병분파소를 습격하여 헌병 3명을 죽이고 건물을 불태우는 등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09년 1월에는 호남창의소 맹주의 명의로 왜적에게 보이는 글을 발표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지속되는 전투와 일본군의 추적으로 인하여 의병부대를 유지하는 것이 점점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상황을 타개하고자 보성군 보성읍(寶城邑) 대야리(大野里) 모령동(茅嶺洞)의 자택에 은거하면서 군수품 보충에 힘썼다. 그러다가 동장(洞長) 박덕명(朴德明)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장흥헌병대의 습격을 받아, 1909년 5월 17일 붙잡혔다. 이후 적법한 재판절차 없이, 같은 해 5월 20일 살해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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