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濬衡
濬衡1875. 4. 21 ~ 1942. 10. 1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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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75년 4월 21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동후면(東後面) 도곡동(道谷洞)에서 아버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과 어머니 김우락(金宇洛)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는 문극(文極)이며, 호는 동구(東邱), 이명은 이재섭(李在燮)·이동호(李東皐)이다. 아버지 이상룡은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주역이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독판(督辦),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계의 큰 지도자였다. 아버지와 함께 재종(再從) 할아버지, 두 명의 숙부 및 사촌형제들, 아들 병화(炳華)까지 9명이 항일 독립운동을 수행해 건국훈장을 수여한 독립운동계의 명문 집안이다. 1907년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안동에 신교육기관인 협동학교(協同學校)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때 작은 아버지 이봉희(李鳳羲)의 지원을 받으며, 부친 이상룡이 마련해준 지원금을 들고 가서 협동학교 설립에 참여하였다. 협동학교는 전통유림세력이 강한 안동지역의 사상적 물결을 근대적으로 바꾸어 놓는데 혁신적 역할을 하였다. 이어 부친의 뜻을 받들어,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 설립에 나섰다. 부친의 지시를 받아 유림들을 설득하는 작업, 서울 본회와의 연락 등을 맡아 일을 추진하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1909년 (음)3월 전국 86개 지회 가운데 60번째로 설립되었다. 대한협회 안동지회는 반상의 차이, 노소의 구별 없이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즉 유교적 신분질서를 벗어나 평등한 관계에서 뜻을 모아 국민의 능력을 키우는 데 앞장섰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병탄되는 경술국치를 당하였고, 이상룡은 국내에서의 활동으로 나라를 되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가산을 정리하고 가솔들을 대동해 1911년 1월 5일 고향 안동을 떠나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도착하니, 국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회원들인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 일가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이들과 힘을 합해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시작하였다. 국내에서 한인들을 이주시켜 한인사회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학교를 세우고 청장년들에게 일제와 싸울 수 있는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를 체계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1911년 4월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고, 이상룡이 초대 사장에 선출되었다. 서간도로 이주한 이후 부친의 지시를 받아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열심히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류허현에서의 첫 해 독립운동기지 건설 사업은 크게 실패하였다. 그해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맞을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동사와 풍토병으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12년 퉁화현(通化縣)으로 한인들을 이주시켜 독립운동기지 건설 사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곳은 합니하(哈泥河) 강줄기를 따라 논을 만들 수 있어 수전(水田) 농사를 짓기 좋은 지역이었다. 이상룡은 서간도에서 수전 농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기온과 일조량이 비슷한 홋카이도(北海道) 볍씨까지 구해 시험재배하고 이를 성공시켰다. 이때 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고향 안동으로 가 논밭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였다. 1919년 3월 1일 전민족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서간도지역에서도 국내의 열기를 이어 받아 한인사회 곳곳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그 열정을 한 곳으로 모아 1919년 4월 본격적인 독립운동 전개를 목표로 한 한족회(韓族會)를 성립시켰다. 한족회는 그해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해 오직 독립운동을 이끌 산하기구로 만들었던 군정부(軍政府)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였다. 부친 이상룡이 이 서로군정서의 최고지휘관인 독판에 선임되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서북간도에는 서로군정서뿐 아니라 수십 개의 독립군단이 성립되어 만주와 한국 내의 일제기관을 습격해 파괴하고, 그 수뇌부 및 친일파들을 척결하였다. 이에 일제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독립군과 배일한인들을 초토화시키고자 1920년 10월부터 약 2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독립군들은 일본군들과 맞붙어 청산리대첩이라는 대승첩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일본군들은 그 보복으로 독립군의 근거지 및 한인사회를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를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이라 한다. 일본군의 만행이 자행되고 있는 동안 부친 이상룡의 안전을 위해 산간 오지로 피신하였다. 이상룡이 서간도지역에 주둔하는 독립군들의 실질적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일본군들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1921년 4월 일본군들이 철수하고 난 후, 부친 이상룡과 함께 파괴된 한인사회와 독립군기지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서간도지역 독립군들은 범위를 확대해, 1922년 8월 남만지역 한인사회 전체를 한 관할지역으로 해 통합 독립군단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설립하고, 1924년 11월에는 참의(參議)·신민부(新民府)와 함께 3부 중의 하나인 정의부(正義府)를 성립시켰다. 이들 과정에서 이제는 현역으로 앞에 나서기 어려운 이상룡이었지만, 찾아오는 독립군 후배들에게 조언을 하면서 일이 성사되도록 힘썼다. 이 과정에서 사촌 동생 이광민(李光民)과 함께 부친을 보좌하였다. 1925년 9월 24일 부친 이상룡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취임하였지만, 이상룡은 힘 있는 정부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임명된 국무위원들이 취임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임시정부 내에서도 서로 알력싸움을 벌어져 정부를 제대로 운영할 수가 없었다. 결국 취임 5개월 만인 1926년 2월 그를 보필했던 조카 이광민과 만주로 돌아왔다. 이후 70세 가까운 노인이 된 부친 이상룡이 더 이상 활동이 어렵자 판스현(磐石縣), 지린(吉林) 등으로 거처를 옮기며 모셨다. 그러나 1932년 5월 12일 지린성 수란현(舒蘭縣)에서 부친이 사망하자, 그해 7월 19일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이후 10년 세월이 흘러도 부친과 함께 그렇게 바라던 조국 광복이 이루어지지 않자, 1942년 (음)9월 2일(10월 12일) 자결하였다. 사망하기 전 부친 이상룡의 일생을 기록한 『유사(遺事)』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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