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衡國
衡國1886. 12. 12 ~ 1931. 3. 2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경학사
- · 광업사
- · 신흥무관학교
- · 신흥사
- · 부민단
- · 한족회
- · 안동농회
- · 신간회 안동지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6년 12월 12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덕면(盈德面) 삼근동(三近洞)에서 아버지 이상동(李相東)과 영해 신씨(寧海申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후 경북 안동군(安東郡) 월곡면(月谷面) 도곡동(道谷洞, 현 와룡면 도곡리)의 본가로 돌아왔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자는 시윤(時尹)이고, 호는 창해(滄海)이다.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백부이고, 이운형(李運衡)이 동생이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1904년 본가가 있는 도곡동의 도동서숙(道洞書塾)과 측량학교(測量學校)를 졸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에 즈음하여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11년 백부인 이상룡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경학사(耕學社)·광업사(廣業社)를 설립하고 농장 경영을 하는 등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2년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 군사양성과(軍事養成課)를 졸업하였다. 1913년 경학사와 광업사에서 경영하는 농장의 흉년으로 신흥중학교의 재정난이 심각해지자, 이상룡의 지시에 따라 학교 운영자금 20만 원을 조달하기 위하여 국내로 파견되었다. 1913년 8월 박경종(朴慶鍾)·이승화(李承和)·이종태(李鍾泰) 등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신의주(新義州)의 황종언(黃鍾彦), 충청남도 공주(公州)의 정해일(鄭海日)·이승연(李昇淵)을 만나 독립군 양성과 독립군자금 모집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대구(大邱)에서 이헌교(李憲敎)·이치삼(李致三)·배언봉(裵彦奉)·우치여(禹治汝)·박문락(朴文洛) 등을 만나 비밀결사 신흥사(新興社)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이 사실을 탐지한 일제 경찰에게 황종언·박경종·이승연·이승화·이종태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15년 9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월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들어가 1916년 이상룡·허혁(許爀)·김동삼(金東三) 등이 조직한 부민단(扶民團)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에는 이상룡·김동삼·김규식(金圭植) 등이 조직한 자치기구 한족회(韓族會)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백부 이상룡이 종손의 임무를 맡겼으므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대의 문적(文籍)을 수습하여 1930년 『철이세록(鐵李世祿)』 29편을 완성하였다. 한편 도곡동에 있는 모교 도동학교(道洞學校)를 확장하였으며, 안동 법흥리(法興里)의 임청각(臨淸閣)에 동흥학교(東興學校)를 설립하고, 월곡면 복천서당(福川書堂)에는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여 학감(學監) 겸 강사(講師)로 헌신하였다. 1926년 4월 안동군농회(安東郡農會)의 통상의원(通常議員)을 역임하였고, 1927년 8월 유인식(柳寅植) 등과 함께 신간회(新幹會) 안동지회(安東支會)를 조직하였다. 1928년 3월에는 신간회 안동지회의 선전부(宣傳部) 총무간사(總務幹事)에 선출되었으며, 1929년 8월 신간회 안동지회의 교육부장(敎育部長)을 역임하는 등 민족운동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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