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大根
大根1871. 9. 25 ~ 1950. 9.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1년 9월 25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종문(李鍾文)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1일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의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4월 1일 오후, “오늘 밤 모두 면사무소로 가서 만세시위를 하자”는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의 제안을 받고,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이병문(李丙文)·이병오(李丙五) 등 주민들과 함께 이날 밤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면사무소 앞에서 전개된 이날의 만세시위는 원곡면 전역에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하여 독립에 대한 높은 열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유석·홍창섭·최은식(崔殷植) 등의 지휘에 따라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유석 등 만세시위의 주도자들은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을 면사무소 밖으로 끌어내어 그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평소 주민들에게 위압적인 태도로 대하던 면장 남길우 이하 면사무소 직원들은 전혀 저항하지 못하였다. 만세시위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 주도자들은 일제의 경찰주재소, 우편소 및 양성면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양성면으로 행진하여 양성면의 주민들과 함께 더욱 적극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양성으로 가자”는 주도자들의 지휘에 따라 다른 주민들과 함께 호응하여 만세시위 행진의 대열을 갖추고, 선두에 원곡면장 남길우를 앞세웠다. 이석근(李奭根) 등 만세시위에 참여한 다른 주민들과 함께 전체 대열을 선도하여 앞길을 밝히는 횃불을 들고, 양성면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이날 밤 양성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오후 9시경부터 수백 명의 양성면 주민들은 경찰주재소 앞에 모여 일제 경찰을 향해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양성면의 주민들은 만세시위를 정리하고 해산하려고 했으나, 이때 원곡면 방향의 성은고개에서 양성면 방향으로 횃불을 밝히고 행진해 오는 원곡면의 만세시위대와 마주하였다. 이를 확인한 양성면의 주민들은 곧바로 원곡면 주민들과 합류하여 다시금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두 지역 주민들의 연합으로 2,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된 만세시위대는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가장 먼저 일제 경찰의 주재소로 행진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참여하였다. 최은식·최창용(崔昌鎔)·홍재의(洪在義)·최문섭(崔文燮) 등과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주재소의 유리창 등을 깨뜨리고, 주재소 건물에 불을 질러 소실시켰다. 이후 만세시위대와 함께 양성우편소 등으로 행진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박옥동(朴玉童)·박정식(朴正式)·이종만(李鍾萬) 등은 우편소를 향해 돌을 던져 기물을 부수고, 집기 및 서류들을 모두 가지고 나와 우편소 앞마당에서 소각시켰다. 손정봉(孫正奉)·김종상(金鍾商) 등은 양성면 면사무소로 쳐들어가 보관되어 있던 호적원부 등 각종 서류와 집기들을 소각시켰다. 또 일부 만세시위대는 양성면의 일본인 상점과 집으로 행진하여 상점 기물 및 주택의 가구들을 불태웠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이후 일제는 4월 3일 원곡, 양성 지역으로 조선주차군 제79연대 소속 3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파악되어 안성경찰서로 끌려갔다. 다른 만세시위 참여자들과 함께 이른바 내란죄를 이유로 고등법원 재판에 회부되어 내란죄 적용 여부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죄 등으로 징역 1년 3월(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