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富根
富根1899. 6. 29 ~ 1986. 9.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창원군 웅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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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9년 6월 29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웅동면(熊東面) 마천리(馬川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창원군 웅천면(熊川面)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최초로 만세운동이 거행된 창원군에서는 여덟차례의 만세시위와 세차례의 만세시위 계획이 있었다. 웅천면에서는 3월 20일 성내리(城內里)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고, 4월 3일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웅천면에서의 만세시위는 민족주의 인사들의 결의로 시작되었다. 평소 투철한 항일의식을 갖고 있었던 사립 계광학교(啓光學校)의 주기용(朱基溶)을 중심으로 정운조(鄭雲朝)·문석주(文碩柱)·김병화(金炳化) 등과 더불어 4월 3일 웅동면 마천리(馬川里)의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계획이 누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임 장소를 여러 번 바꾸기도 하였다. 이때 군중 동원을 위한 마을별 연락과 태극기 제작 등에 참여하였다. 준비 과정에서 정운조·문석주가 일제 헌병에게 검거되었지만, 모진 고문에도 계획을 누설하지 않아 예정대로 만세시위를 진행할 수 있었다. 4월 3일 마천리 면사무소 앞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500~6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오전 11시경 주도자들과 함께 태극기 등을 군중들에게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선두에서 호응하는 군중을 이끌고 웅천 읍내를 향해 행진하였다. 여러 마을을 지나면서 주민들이 합세하였고, 읍내에 도착하자 시위대의 규모는 약 3,000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만세시위 규모를 축소하는 일제 군경의 자료에도 시위대의 규모가 약 2,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세시위의 소식을 듣고 출동한 웅천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총검을 휴대하고 시위대를 진압하였고, 이후 진해로부터 급파된 일제 군경 등이 강제 해산과 진압에 가세하였다. 이어진 일제 군경의 강압적인 진압으로 주도자들을 포함한 수십 명이 연행되자, 결국 시위대도 오후 2시 30분경 해산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5월 2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부산감옥 마산분감에서 옥고를 겪고 1920년 4월 28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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