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北述
北述1887. 8. 10 ~ 1970. 4. 1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의성군 안평면
- · 봉양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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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7년 8월 10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안평면(安平面) 대사동(大司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화실(李華實)·이호출(李浩出)이다.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까지 의성군 안평면과 봉양면(鳳陽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초순 일어난 서울과 평양 등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의성군 안평면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한국의 절대적 독립을 쟁취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다.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주일 낮 예배를 위해 신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목사인 이종출(李鍾出)·김옥돈(金玉頓)·이양준(李良俊) 등과 함께 각지의 만세운동 상황과 대구 학생들의 만세시위 소식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에 동지를 규합하여 안평면에서도 만세시위를 거행하자고 제의하였고, 거사 준비를 위해 이맹준(李孟俊)·이수원(李守元)·이만준(李萬俊)·배세태(裵世泰)·정갑이(鄭甲伊)·이흔이(李欣伊) 등에게 계획을 알리고 본격적으로 거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3월 15일 오후 7시 100여 명의 대사동 주민들과 함께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다음날인 16일 오후 8시에는 50여 명과 함께 대사동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마전동(馬轉洞)·기도동(箕道洞)을 거쳐 창길동(倉吉洞)까지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펼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이틀간의 만세시위로 독립운동의 소식과 열기가 달아오르자, 안평면 일대 주민들의 참여 또한 증가하였다. 3월 17일 오후 8시경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모인 150여 명의 주민들을 선두에서 이끌며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였고, 중도에 합세한 250여 명과 함께 안평면의 도옥동(都玉洞)·창길동·괴산동(槐山洞)·박곡동(朴谷洞)·신월동(新月洞)·하령동(河寧洞)·산춘동(三春洞) 등을 차례로 돌며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때 석탑동(石塔洞)에서는 주민 10여 명이 마을 안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며 행진하기도 하였다. 3월 18일 밤에는 대사동 주민 20~3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마전동·기도동을 거쳐 창길동·박곡동·괴산동·석탑동·신월동 등으로 이어서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각 마을을 지날 때 마다 주민들이 합세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3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안평경찰주재소 경찰이 출동하여 150여 명을 체포하고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3월 19일에는 정오경 이양준·전응주(全應珠) 등의 주도로 대사동에서 시위대와 함께 출발해, 창길동·괴산동·도옥동·신안동·하녕동 등을 지나서 봉양면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봉양면 사부동(沙阜洞)을 거쳐 도원동(桃源洞)에 위치한 도리원(桃李院)시장까지 진출한 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오후 1시경 ‘독립만세’를 외치던 시위대가 도리원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하며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대구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보병 80연대로 지원을 요청해 보병장교 이하 27명이 급파되었다. 이후 몽둥이와 돌로 무장한 시위대와 함께 도리원주재소를 공격하였지만, 일제 군경에게 저지당하였다. 결국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주재소 공격을 선두에서 이끌던 권해운(權海雲) 등 2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후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7월 1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8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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