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守烈
守1903. 12. 26 ~ 1971. 6. 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0)
관련 사건
- · 1919년 동래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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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0) 1903년 12월 26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동래면(東來面) 칠산리(漆山里, 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에 재학 중이었다. 학교 선배인 엄진영(嚴進永)·고영건(高永建)·김귀룡(金貴龍) 등과 함께 3월 13일 동래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동래군 만세운동은 동래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3월 1일부터 만세운동을 전개한 서울의 학생들은 3월 5일의 남대문(南大門) 만세시위 이후, 만세운동의 지방 확산을 위해 대거 귀향하였다. 3월 7일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 대표가 동래고등보통학교의 학생 대표인 4학년 김귀룡·고영건·엄진영 등을 찾아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지역에서의 만세운동 조직을 당부하였다. 이에 김귀룡·고영건·엄진영 등은 즉시 나라의 독립을 위한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동래에서의 만세운동 조직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김인호(金仁浩)·이상덕(李相德)·박득룡(朴得龍)·윤삼동(尹三東) 등 4학년 동급생들을 소집하여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3학년 추규영(秋圭映)·김원룡(金元龍)·김기삼(金琪三) 등이 동지로 결합하였고, 당시 2학년으로 동급생인 임명조(林命祚)와 함께 만세운동의 동지로 결합하였다. 3월 10일경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의 졸업생으로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에 재학 중이던 곽상훈(郭尙勳)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들과 함께 엄진영·오종식·고영건 등의 집을 옮겨 다니며 만세운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동래의 장날인 3월 13일 옛 동래군청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만세시위의 준비에 착수하였다. 3월 11일부터 13일의 새벽에 걸쳐 고영건의 하숙집에서 학교 등사판을 가져와 독립선언서 500장을 등사하고, 주민들에게 배포할 태극기 수백 장과 함께 큰 글씨로 대한국독립만세(大韓國獨立萬歲)’라고 쓴 대형 깃발,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 쓴 선전격문 등을 준비하였다. 3월 13일 학교의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을 품속에 숨기고, 옛 동래군청으로 향하였다. 오후 2시 경 엄진영이 옛 군청의 정문 위로 올라가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만세시위의 시작을 기다리던 학생들과 이 모습을 본 주민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곧이어 ‘대한국독립만세’라고 쓰여진 2개의 깃발이 세워졌고, 이를 신호로 동지들과 함께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였다. 이렇게 만세시위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하자, 한국인 경찰 1명과 헌병 보조원 1명도 제복을 벗어버리고, 한마음으로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동래면 곳곳을 행진하였다. 하지만, 만세시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 기마경찰 30여 명과 수비군 50여 명의 출동하였다. 이들은 만세시위대를 향해 공포탄을 쏘고, 위협사격 등을 통해 만세시위를 강제 해산시키고,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른 20여 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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