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相乙
相乙1907. 12. 22 ~ 1944. 6. 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간회(영주)
- ·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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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7년 12월 22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영주면(榮州面) 휴천리(休川里, 현 영주시 휴천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동식(李東軾)이다. 1926년 2월 영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영주 지역 사회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영주청년동맹(寧州靑年同盟)과 신간회(新幹會) 영주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9년 7월 30일 신간회 영주지회 임시대회에서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3월 18일 신간회 영주지회 동료들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격문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신간회 영주지회 선전부 위원 송위길(宋渭吉)의 자택에서 「만천하 피압박 대중에게 격문을 띄우다」라는 제목의 격문 원고를 작성하였다. 격문 속에 “우리들의 피폐한 환경은 포악무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획득하고 광주학생사건 피고들의 무죄를 주장하자” 등의 내용을 적어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격문을 원고지로 옮겨 적은 뒤 영주청년동맹 영주지부 회관으로 가서 격문 763장을 등사기로 인쇄하였다. 김증길(金曾吉)·김계진(金季鎭) 등과 함께 모여 논의한 결과, 영주 시내에 장이 서는 1930년 3월 24일 오후 12시에 격문을 살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을 실행할 방법으로서 김증길·송위길·정회복(丁會福)·박승헌(朴勝憲)·김계진과 함께 일제히 격문을 살포한 후 함께 만세를 외쳐 군중 참여를 독려함으로써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거사 하루 전날인 1930년 3월 23일 밤 이들의 행동을 탐지한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모두 붙잡혔다. 그 해 4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1932년 5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榮州共産主義協議會)에 가입하였다.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는 영주 지역에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을 설립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농민운동 및 반제운동을 전개한 비밀결사로서 반제동맹의 하부 그룹 조직인 반제동맹 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933년 2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의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됨에 따라 동지 100여 명과 함께 다시 경찰에 붙잡혔다.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일수 300일 본형에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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