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石潭
石潭1859 ~ 1930. 5.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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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1)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고산면(高山面) 석담리(石潭里)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59년생으로 추정된다. 율곡 이이의 11대손인 이한영(李漢永)의 일곱 자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이명은 서염윤(徐艶潤)·서정민공(徐貞憫恭)·이서홍(李書虹)이다. 해주의 유서 깊은 양반 가문에서 성장하여 유년 시절 한글과 한문을 수학하였다. 19세에 양반 출신의 신언구(申彦九)와 혼인하였으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혼자가 되었다. 남겨진 가족을 부양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 당시 황해도에서는 평산군 출신 조맹선(趙孟善) 의병부대가 활동하였다. 평소 애족심이 강하여 무력을 앞세워 명성황후(민비)를 살해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국권을 빼앗은 일제의 잔학무도함에 분노하였다. 평산 지역 지사들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이때 평산 의병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마을의 청년들에게 의병활동에 참여할 것을 적극 권유하였고, 의병부대를 먹일 식량과 구호품을 전달함으로써 의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일본군이 마을 주민들에게 “의병에 협조하는 자는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함에도 굴하지 않고 조맹선 의병부대가 마을로 내려오면 그들을 집에 숨겨주면서 숙식을 제공하였다. 집안에 있는 군수품을 의병에게 제공하였음은 물론 의병부대의 궁핍한 생활을 듣고는 집안의 전답을 매도하여 그 금액을 전부 의병들의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면서 “이것이 나라의 땅인데, 나라 찾기 위하여 싸우는 마당에 아껴둘 수 있느냐”하고 말하여 지역 주민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한국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간책을 활용하였다. 그중 하나가 유림을 회유하기 위한 은사금(恩賜金) 정책으로서, 일제는 유림을 포함한 한국 사회 지도층에 있는 인물에게 작위를 주거나 은사금이란 명목의 돈을 주어 이들을 회유하고 지조를 꺾어 변절시키고자 기도하였다. 부인들의 경우 지역사회에서 인정하는 열녀 및 효부를 대상으로 은사금을 주기로 결정하였는데, 면장이 어느 날 찾아와 은사금이 왔다고 말하며 그것을 전달하려 하였다. 그러자 “나라를 망하게 한 일본이 준 돈을 어찌 받을 수 있을 것이며 칼날 아래 엎드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돈은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완강히 거절하였다. 면장이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일제는 헌병을 동원하여 다시 찾아와 은사금을 받을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이에 맞서 단호하게 거절함으로써 항일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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