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현
李升鉉1878. 10. 4 ~ 1943. 2.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공주군 신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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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8년 10월 4일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신상면(新上面, 현 공주시 유구읍) 신달리(新達里)에서 태어났다. 이성현(李聖鉉)이라는 이명이 있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그 해 3월 14일 공주군 신상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4일 공주군 신상면 유구장터 만세시위는 황병주(黃秉周)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10여 년 전부터 천도교에 입문하여 활동하고 있던 도중 『매일신보』의 기사를 통해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본받아 당시 살던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황병주는 3월 14일 오후 4시 장터로 나가 30여 명의 군중 앞에서 자신의 모자를 벗어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주변의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공감하여 만세시위에 합류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시간이 갈수록 시위대의 규모는 확대되었고, 만세시위대가 장터의 우(牛)시장 앞으로 행진할 무렵 유구주재소(維鳩駐在所)의 순사들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다. 일제 경찰의 강압적인 해산명령에 분노한 주민들이 만세시위대에 참여하면서 그 규모는 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일제 경찰은 우선 시위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주도 인물인 황병주를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수백 명의 시위대 앞에서 일제 순사가 황병주를 연행함에도 저항하지 않는 모습에 분노하여 “어찌하여 가만히 보고만 있는가. 주재소로 가서 황병주를 구출하자”, “다른 사람들은 주재소로 몰려갔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가만히 있는가. 나와 함께 가자”고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그 후 황연성(黃璉性)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하여 유구주재소로 달려갔다.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시위대 선두에 서서 황병주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황병주를 석방하지 않으면 군중을 해산시킬 수 없다”고 일제 경찰에 경고하며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나, 일제 경찰들은 석방 요구를 거부하고, 시위대의 해산을 압박하였다. 이러한 주재소의 순사들의 태도에 분노한 박준빈(朴準斌)은 다카야마 덴세키카이몬(高山傳右衛門) 순사를 구타하였고, 현우석(玄宇錫)은 몽둥이로 주재소의 정문과 전등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행동을 적극 독려하면서 다른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 창문에 돌을 던져 깨뜨리는 등 주재소의 시설을 파괴하면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공주경찰서는 순사와 헌병 10여 명을 유구주재소로 급파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도 인물 2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함께 붙잡혔다. 일제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사실이 인정되어 법원으로 송치되었다. 1919년 6월 16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10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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