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洙吉
洙吉1883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황주군 황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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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상전면(三田面) 내송리(內松里) 출신이다. 1919년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나이가 36세로, 1883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일 황해도 황주군 황주면(黃州面) 남천시장(南川市場)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平壤)·안주(安州)·의주(義州)·선천(宣川)·원산(元山)·진남포(鎭南浦) 등의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시작되었다.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의 천도교인 최창룡(崔昌龍)은 만세운동 소식과 더불어 독립선언서 10부를 황주면 천도교구에 전달하였다. 황주면 읍내 천도교구의 소(小) 교구장 김성준(金聲駿)과 교훈(敎訓) 황기타(黃己拕)는 다음날 남천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일은 천도교인들이 많이 모이는 일요일이며, 장꾼과 인근 주민들이 운집하는 장날이기 때문이다. 황기타와 김성준은 황주군 내에서 평소 독립을 열망하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3월 2일 남천시장에서의 만세시위 계획을 알렸다. 그러자 황주면(黃州面) 황강리(黃崗里)의 최석길(崔錫吉)과 김광섭(金光燮), 성남리(城南里)의 김병식(金炳植), 벽성리(碧城里)의 조진영(趙鎭榮) 등이 동참하기로 약속하였다. 아울러 천도교구실은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거사 계획을 전파하였다. 3월 2일 오후 2시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남천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먼저 조진영이 장터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알림과 동시에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또한 황기타는 천도교인들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한편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평소 4,000여 년의 역사와 선조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삼천리 강토에서 자라온 민족임을 자부하였던 바, 이때 만세시위에 참여해 시위군중과 더불어 행진하였다. 남천시장에서 출발한 시위대와 함께 황주경찰서에 도착하자, 만세시위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일제 경찰들이 저지하면서 김병식과 강형섭(康亨燮)을 체포하였다. 그러자 격분한 시위대와 더불어 체포된 인사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때 표정일(表正一)·이준근(李俊根)·최석길 등은 시위대 40여 명을 이끌고 경찰서로 진입해 내부 집기를 파손하였다. 이어서 경찰서에서 나온 시위대와 더불어 대오 정비를 목적으로 기독교 예배당으로 이동하였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도 합류하였다. 이후 시위대 200여 명과 함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천도교당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한편, 황주경찰서에서는 만세시위의 확산을 막기 위해 증원을 요청하였고, 소방조(消防組)까지 투입하였다. 이후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색출 작업과 검문 검색을 강화하였다. 오후 5시 쉬고 있던 천도교당으로 출동한 일제 군경에게 황기타·최석길·김광섭·표정일 등을 포함한 80여 명과 함께 붙잡혀 연행되었다. 이 일로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다. 그러자 “무릇 법이란 불법자를 처벌”하는 것이라면서 “제 나라 국토보전과 국민의 안락”을 추구하는 자를 처벌하는 것을 개탄하고 “동양평화와 또한 세계의 운명”을 비추어 공정한 판결이 있기를 바란다고 주장하며 다시 상고하였다. 같은 해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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