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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英雨

英雨

1901. 12. 21 ~ 1979.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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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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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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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1년 12월 21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죽백리(竹栢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건화(李建和)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1일안성군 원곡면·양성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의 이양섭(李陽燮) 등의 주도로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의 두 지역 주민들이 연합하여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919년 4월 1일 연합만세운동은 원곡면의 주민들이 주도하였다. 이날 오후 이양섭으로부터 면사무소 앞에서 새로운 만세시위가 진행될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원곡면사무소 등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1,000여 명의 군중은 기세를 몰아 일제의 경찰주재소, 우편소 및 양성면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양성면으로 갈 것을 결정하였다. 주민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만세시위대열을 형성하여 횃불을 밝히고, 양성면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행진하였다. 한편, 양성면에서도 수백 명의 주민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해산하려던 즈음에 양성면 주민들은 양성면으로 향해 오는 원곡면의 만세시위대를 발견하였다. 이에 양성면과 원곡면의 주민들이 합류하였다. 약 2,000명의 규모로 확대된 시위대는 더욱 기세를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가장 먼저 일제 경찰의 주재소로 행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최은식 등과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주재소의 유리창 등을 깨뜨렸다. 일제 경찰들이 도주하자, 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주재소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후 만세시위대와 함께 양성우편소 등으로 행진하여 매우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또 양성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상점과 집으로 행진하여 상점 내기 기물 및 가구들을 불태워 버렸다. 주도 세력의 지휘에 따라 다음 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원곡면으로 돌아와 원곡면사무소까지 소실시킨 후 해산하였다. 이후 연합만세시위에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 일제 군경에게 붙잡혀 연행되었다. 동지들과 함께 이른바 내란죄로 고등법원의 재판에 회부되었다. 해를 넘긴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만세운동은 소요죄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고 판결하고, 경성지방법원을 관할 법원으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이에 대해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이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을 선언함에 따라, 실제 재판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진행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 방화죄로 징역 1년 3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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