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락
1897. 8. 3 ~ 1972. 6.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울산군 온양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7년 8월 3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온양면(溫陽面) 덕신리(德新里,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덕신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학성(鶴城)이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4월 8일 울산군 온양면 남창리(南倉里,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남창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平壤)·안주(安州)·의주(義州)·선천(宣川)·원산(元山)·진남포(鎭南浦)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난 이후, 울산군에서는 3월 말부터 천도교인·학생·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본격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30일 울산군 각 면에는 울산군청(蔚山郡廳) 명의로 면사무소의 직원들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라는 내용을 기재한 격문이 배포되었다. 4월 2일에는 언양면 남부리(南部里) 언양시장 장날을 맞이하여 천도교인들이 만세시위를 하였고, 하상면(下廂面, 현 울산광역시 중구 일대)에서도 4월 4~5일 청년회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한편 온양면 석천리(石川里)에 거주하는 이재락(李在洛)은 서울에서 고종 장례식에 참여한 후, 몰래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귀향하였다. 그리고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을 듣기 위해 방문한 이수일(李樹一)에게 선언서를 보여주었다. 이수일은 온양면에서 만세시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학성 이씨 문중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이때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이수일·이수락(李壽洛)·이희계(李希季)·이쾌덕(李快德) 등과 함께 남창시장 장날인 4월 8일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어서 4월 7일에는 주도자들과 함께 본인 집에서 밤새도록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다. 준비 과정에서 석천리에 거주하는 이쾌경(李快慶)이 합류하였다. 4월 8일 만세시위 주도 인물들과 함께 태극기를 휴대하고 남창시장에 집결하였다. 오후 4시 무렵 시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주동자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사람들이 호응하며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일제 군경은 공포탄을 쏘면서 시위대를 진압하였고, 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군경의 진압을 피해서 윤두찬(尹斗讚)의 포목점으로 잠입한 뒤, 그곳에서 확보한 광목에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후 다시 장터로 이동하였다. 이때 고기룡(高基龍)은 광목으로 작성한 기를 들고 시위대 선두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4월 8일 오후 11시 무렵 일제 군경에 붙잡혀 남창주재소로 압송되었으며, 남창리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6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는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69년에는 3·1운동 50주년을 맞이하여 8년의 기간 동안 전국을 다니며 3·1운동에 참여한 생존자들의 증언 등을 담아낸 『삼일운동실록(三一運動實實錄)』을 펴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