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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元秀

元秀

1873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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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元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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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단천(端川)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단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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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단천군 파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2)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하다면(何多面) 풍화리(豊和里) 출신이다. 1919년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47세로 1873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단천군 파도면(波道面)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함남 단천군에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소식이 전달된 과정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천도교(天道敎) 인사들이 단천군 만세시위를 주도한 사실을 보면 3월 1일을 전후로 천도교 인사들이 서울과 원산(元山)에서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일제 군경의 경계를 피해서 은밀하게 단천군의 천도교 인사들에게 만세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단천군 파도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8일 단천군 천도교 교구장 염원형(廉元亨)과 천도교회 서기 설운룡(薛雲龍), 약재상 최덕복(崔德福), 농업에 종사한 최석곤(崔錫崑)·안성교(安聖敎) 등이 3월 10일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순도(殉道) 기념 행사 직후 파도면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면서 추진되었다. 최석곤과 설운룡은 염원형의 지시를 받고 그날 만세시위에 사용할 독립선언서 200장을 등사하였다. 3월 10일 오전 11시 무렵 300여 명의 천도교 신자들이 단천군 천도교구실에 모였다. 염원형은 최제우 환원(還元) 기도회를 주재한 후에 천도교 신자들과 일반 군중들에게 만세시위의 주의 사항을 알려주었다. 이어서 염원형·김상갑(金尙甲)·최석곤·설운룡·안성교를 비롯한 시위 주도 세력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대를 인솔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행진하였다. 단천군 천도교구실을 출발해서 읍내 시장을 거쳐서 남문으로 향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읍내 주남리(州南里)에 이르자 단천 헌병분대 소속 일제 헌병들이 시위대의 행진을 저지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시위대의 행진을 저지하고 해산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최석곤은 시위대를 향해서 결코 헌병의 말을 듣지 말고 끝까지 저항하자고 소리쳤으며, 설운룡은 일제 헌병의 명령에 따르지 말고 대항하라고 외쳤다. 일제 헌병대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시위대의 일원으로 막대를 휘두르며 헌병대에 저항하였다. 다른 쪽에서는 일제 헌병을 향해서 돌을 던지면서 저항하였다. 일부 시위대가 일제 헌병이 소유한 무기를 탈취하려고 하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를 하고 군도를 휘두르는 등 무력을 행사하였다. 일제 헌병의 무자비한 무력 진압으로 하다면 출신의 이영호(李永浩), 복귀면(福貴面)의 서봉화(徐鳳化), 신만면(新滿面)의 염석한(廉錫漢)·염석하(廉錫河)·이종환(李鍾煥)이 사망하였다. 이후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1919년 5월 23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8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는 항소를 기각하였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10월 16일 고등법원에서는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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