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寅正
寅正1859. 6. 19 ~ 1934. 5.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서산군 대호지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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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59년 6월 19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사성리(沙城里)의 전주이씨(全州李氏) 양반가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갑산도호부사(甲山都護府使)를 역임한 이택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4년 과거에 급제하여 1897년부터 1912년까지 자인군수(玆仁郡守)를 역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면제(面制)가 시행되면서 초대 대호지면장으로 임명되었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까지 면장에 재직하면서 대호지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호지면 도호의숙(桃湖義塾) 출신의 남주원(南柱元)·이두하(李斗夏)·남계창(南啓昌)·남상직(南相直)·남상락(南相洛) 등 유생들은 1919년 3월 서울에서 열리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였는데, 여기서 만세운동을 접할 수 있었다. 이후 서산 지역에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위 열기가 고조되었다. 면서기 김동운(金東云)·강태완(姜太玩)·민재봉(閔載鳳)과 면사무소 직원 송재만(宋在萬)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이들은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뒤 대호지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은 천의(天宜)장터 장날인 4월 4일로 결정하고, 사전에 면내의 각 리(里)별로 연락망을 구성하였다. 다수의 주민들을 만세시위에 참여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도로수선병목정리(道路修繕並木整理)의 건」이라는 공문을 각 마을에 보내 도로 보수를 위해 한집에 한명씩 4월 4일 면사무소로 모이라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4월 4일 아침 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600여 명의 주민들 앞에서 “여러분을 모이게 한 이유는 도로 수선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 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여러분은 이에 찬성하여 ‘조선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르며 천의장터로 향하라”는 내용의 연설을 한 뒤,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대다수의 주민들이 동의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송재만과 선봉 행동대를 통해 시위 대열을 조직하고, 시위대를 지휘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천의장터로 향하였다. 시위 대열이 천의장터로 행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속속 동참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1,000여 명을 넘었다. 이들을 지휘하여 천의장터의 한복판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조선 독립에 대한 연설회를 개최한 뒤, 천의주재소의 순사들을 무력화시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만세시위가 마무리될 무렵 천의장터로 급파된 당진경찰서 순사들의 발포로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선봉행동대 및 만세시위 참여자들은 일제 경찰들을 구타하여 이들이 소지한 무기를 탈취하고, 부상당한 일제 경찰들이 주재소로 도주하자, 쫓아가서 천의주재소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4월 5일 대호지면으로 출동한 홍성헌병수비대에 붙잡혔다.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가 인정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과 공문서 위조 행사죄, 소요죄를 이유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같은 해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문서 위조 행사 부분은 무죄가 선고되어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1920년 2월 7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0년 12월 24일 출옥하여 귀향하였고, 이후에도 일제 경찰로부터 계속적으로 사찰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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