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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容珪

容珪

1859. 10. 6 ~ 1924.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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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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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옥구(沃溝)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옥구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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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민종식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중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59년 10월 6일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현 군산시) 성산면(聖山面) 도암리(桃岩里)에서 임간(林磵) 이은직(李殷稙)과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장자로 태어났다. 1907년 이후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부여군 서면(西面) 회곡리(檜谷里)와 구룡면(九龍面) 죽절리(竹節里)에서 거주하였다.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자는 성식(聖式)이며, 호는 춘당(春塘)이다. 매부는 1906년 홍주 의병부대를 일으킨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이고, 홍주의진을 지원하다가 붙잡힌 이남규(李南珪)와는 종형제 사이이다. 1906년 민종식이 의병을 일으킬 때 참여한 이후 지속적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등 대한제국 병합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에 병합을 막고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참판을 지낸 민종식이 충남으로 내려와 정산군(定山郡, 현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天庄里)에 거주할 때, 처남으로서 1895년 홍주 의병부대에서 활약하던 이세영(李世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1906년 2월, 이세영과 함께 을미의병기 홍주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안병찬(安炳璨)·박창로(朴昌魯)등과 함께 민종식의 집에서 회합하여 거사를 위한 절차를 논의하였다. 이에 1906년 3월 15일 충남 예산의 광수(光水, 현 청양군 광시) 장터에 모인 300~600여 명의 사람들 앞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선언하였다. 여기에 박창로·안병찬·이세영 등을 비롯하여 정재호(鄭在鎬)·박윤식(朴潤植)·최상집(崔相集)·최선재(崔璇在)·이상구(李相龜)·채광묵(蔡光默)·이만직(李晩稙) 등이 참여하였다. 결성된 의병부대와 함께 곧바로 홍주부(洪州府)로 이동하였으나, 군수 이교석(李敎奭)이 성문을 닫고 의병 동참을 거부하자, 다시 광수로 돌아왔다. 공주로 눈을 돌린 부대는 공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선발대를 보내 정탐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의병부대의 동향을 눈치 채고 서울에서 온 관군이 청양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에, 공주로의 진격을 포기하고, 잠시 홍주군 화성면 합천(合川, 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 공주부 관군과 일제 헌병대가 부대를 기습하여 안병찬·박창로 등 26명이 체포되었다. 의병장 민종식은 간신히 탈출하여 전북 전주(全州)에 머무르면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전주, 진안(鎭安), 용담(龍潭), 장수(長水), 무주(茂朱) 등의 지역을 돌면서 의병을 규합하면서 부대의 재기를 위해 진력하였다. 결국 여산(礪山)에서 3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부대를 재결성하고,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종군하면서 서천(舒川)·남포(藍浦)를 거치며 의병을 규합해, 의병부대는 300여 명 규모로 증가하였다. 1906년 5월 11일 홍산(鴻山) 지치(支峙)에 도착한 민종식은 이상구·문석환(文奭煥)·정재호·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이세영 등과 함께 의병의 기치를 내걸고 본격적인 항쟁에 돌입하였다. 이후 홍주성으로 진군하면서 의병을 모으고, 무기를 수합하였다. 5월 19일 홍주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과의 전투 끝에 홍주성에 입성한 민종식 의병부대는 혼란에 빠진 민중들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편제를 재정비하였다. 김광우·조희수·채광묵이 참모장, 정재호·황영수(黃英秀)·이세영이 중군장 등으로 임명될 때 박영두(朴永斗)와 함께 선봉장으로 선임되어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다음날인 5월 20일부터 공주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헌병부대가 일제히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의병들과 함께 10여 일 동안 홍주성을 수성하면서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하지만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군대를 증파하며 진압을 명령하였고, 5월 31일 새벽 일본군이 폭약을 이용해 홍주성 동문을 부수고 성내로 진입하였다. 이에 민종식과 함께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으나 채광묵·성재평(成載平)·전태진(田泰鎭)을 포함한 수많은 의병들이 사망하고, 부상을 입은 잔병들은 해미(海美)·청양 등지로 흩어져 농부나 행상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은거하였다. 또한 문석환·남규진·유준근(柳濬根)·이식(李侙)·신현두(申鉉斗)·신보균(申輔均)·최상집·안항식(安恒植)·이상구 등 9명은 서울 일본군사령부로 끌려가 심문을 받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홍주성을 탈출하여 본가로 돌아가 은신하다가, 매제 조병두(趙炳斗)와 함께 같은 해 7월 다시 청양 추치(抽峙)에서 의병을 규합하였다. 400여 명을 모은 후 의병부대를 이끌고 부여(扶餘)·노성(魯城) 등지로 이동하며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연산(連山) 부흥리(富興里)를 지나가다가 일본군을 만나 교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때 매제인 조병두가 부상을 입고 붙잡혔다가 결국 사망하였다. 또한 검거를 피해 은신하고 있을 때 아내 박씨와 아들 이성문(李星文)에게 일본군이 찾아와 행방을 물으며 고문을 가하였고, 결국 아들이 사망하였다. 같은 해 8월경 온양의 석암사(石岩寺)와 9월경 공주 노동(蘆洞)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후 1906년 10월 예산군 한곡(閒谷)에 위치한 이남규의 집에서 민종식을 만나 박창로·곽한일(郭漢一)·박윤식·김덕진(金德鎭) 등과 의병항쟁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고, 11월 20일 예산 읍내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제 밀정 역할을 하던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제 헌병대에 발각되었다. 그리고 11월 17일 새벽 일제 헌병 10여 명, 본국 순사와 병정 40여 명, 일진회원 수십 명에게 포위되어 곽한일·박윤식·박창로·이남규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이때 민종식은 신창군 남상면(南上面)에 있는 성우영(成佑永)의 집에 피신한 덕분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 함께 붙잡힌 동료들과 예산주차소(禮山駐箚所)에 감금되어 온갖 고문을 받았다. 이때 일제 순사 10여 명이 봉기의 이유를 묻자, “바다 한 모퉁이의 짐승 같은 너희들을 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뛰며 우리나라의 역적들을 부동하여 임오·갑신·갑오년의 화를 만들어 내고, 을미년의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를 이루기까지 하였다”라고 꾸짖으면서 을사늑약을 통감과 고문을 설치한 일을 비롯하여 일제의 침략상을 나열하였다. 또 “우리들은 500년간 예의를 지키던 백성들로서 어찌 달갑게 너희들의 노예가 될 것이냐? 먼저 5적을 베어서 우리 황상(皇上)께서 밤낮으로 걱정하시는 것을 없애 드리고 이등·장곡천의 머리를 베어 그 임금을 죽인 죄를 증치(懲治)하고, 목인(睦人, 일왕)이 아비를 죽이고 임금이 된 죄를 성토하여 만고의 강상을 바로하며, 왜놈들을 다 없애고 우리 생령(生靈)을 구제할 생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런데 일을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너희 도적들에게 잡히게 되었으니 오직 빨리 죽이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하며 기개를 꺾지 않았다. 그리고 처자식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국가의 원수와 집의 원수는 그 경중(輕重)이 스스로 구별이 있고 크고 작은 것이 현저히 다르다며 재판관을 꾸짖기도 하였다. 이후 평리원(平理院)으로 넘겨져 다음해인 1907년 7월 2일 종신 유형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날 내각 회의에서 종신형으로 감형을 받고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그 해 1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이후에도 일제의 감시와 간섭을 받았지만, 꾸준히 대일항쟁을 계속하였다. 한편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머리뼈가 부서지고 갈빗대가 부러지며 이가 빠지는 상황에서도 민종식의 행방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창 일대에서 탐문하던 일제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된 민종식은 같은 해 11월 20일 붙잡혀 공주부로 압송되었다. 1908년 4월 대한매일신보 사장인 배설(裵說)이 재판에 회부되자, 참고인으로 민종식과 함께 소환되어 각국 공사관 공관원들 앞에서 의병항쟁 당시 겪은 일제의 고문과 압제(壓制)를 폭로하였고, 대마도로 유배를 떠난 의병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또 같은 해 8월 국채보상금 모금액을 각 지방의 이임(里任)과 면원(面員)이 중간에서 가로채자, 그 돈을 추심(推尋)하여 외채를 갚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 대관(大官)들이 이 돈을 기반으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는 누명을 씌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1906년 비인·판교에서 의병부대에 의해 처형된 일본인 가족이 보상금을 청구한 일로 민종식·이식·유준근·문석환 등과 더불어 경성지방법원에 호출되었다. 재판과정에서 “우리 의병들에게 111,957원은 고사하고 의논할 것도 없으며, 만일 얼마 간의 돈이 있다면 이것으로 마땅히 다시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도모할 것”이라고 답변하며 거부하였다. 1909년 8월에는 청양 추치에서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켰으나, 김창식(金昌植)·이기상(李起常)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10년 병합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1911년 5월에는 민종식이 여주 영능(英陵)에 있는 개간하지 않은 땅 몇 만평을 총독부의 인가를 얻어 개간하려 하자, “우리나라 3천리 강토를 저들이 빼앗아 갔는데, 어찌 땅을 개간해서 혼자 잘 살려고 하느냐”며 만류하기도 하였다. 또 그해 10월에는 승지를 지낸 노병직(盧秉稷)과 참의를 지낸 장남기(張南基), 선비 송순태(宋舜台) 등과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1912년 봄 순사인 사촌에게 체포된 서원순(徐元純)이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실패하였다. 같은 해 4월 6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송순태(李元永)·권호(權浩)·남태진(南台鎭)·이충헌(李忠憲) 등 30여 명과 함께 붙잡혔지만, 8월 특사로 풀려났다. 1916년 7월 이후에도 이만직(李晩稙)·윤병일(尹炳日)과 함께 연산(連山, 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 한양리(漢陽里)에 위치한 이내수(李來修)의 집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1917년에는 박동신(朴東臣)이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명목으로 이들과 접촉하고, 마패(馬牌)와 어보(御寶)를 구해 독립운동에 사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자 전용규(田鎔圭)·손진형(孫晋衡)이 어보를 구해 박동신에게 넘겨주었지만, 어보를 받은 박동신이 총독부에 밀고해 실패하였다. 이 일로 10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붙잡혔고, 경남 통영(統營)의 욕지도(欲知島)로 유배되었다. 1918년 12월에는 일제의 침략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자료를 정리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고 하다가 붙잡혔다. 그리고 윤이병(尹履炳)·이태민(李台敏)·이헌교(李憲敎)·안상덕(安尙悳)·한남수(韓南洙) 등 5인과 함께 예심원감옥소(豫審院監獄所)에 수감되었고, 징역 6월을 받았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함께 일제에 항거하던 이내수와 함께 국민대회를 추진하고 이른바 ‘한성정부’에 충남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한국은 독립국이므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적국인 일본에 납세하지 말 것, 재판 및 경찰과 행정명령을 받지 말 것 등을 요지로 하는 ‘임시정부포고문 및 임시정부령 제1호·제2호’라는 제목의 취지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이른바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으로 같은 해 12월 19일 징역 10월(미결구류일수 중 12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1920년 3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윤이병·이헌교(李憲敎)·이민태(李敏台) 등과 더불어 무죄를 받았다. 오준선(吳駿善)이 항일의병항쟁기를 기록한 『의사이용규전(義士李容珪傳)』을 편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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