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龍佑
佑1898. 12. 7 ~ 1930. 6.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함안군 함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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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8년 12월 7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면(咸安面) 봉성동(鳳城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9일 함안군 함안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함안군 만세운동은 고종 장례식에 참석했던 조병흠(趙丙欽)·조문국(趙文國)·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 등 지역 인사들이 돌아와서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기획되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안지호(安知鎬)·곽종한(郭鍾漢)·한종헌(韓鐘憲)·이희석(李喜錫) 등과 함께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거사일을 함안면 장날, 사람이 많이 모이는 3월 19일로 결정하고 모인 군중들에게 배포할 태극기, 독립선언서 등을 준비하였다. 또 군중 동원을 위해 함안 각 지역 책임자를 결정하고 연락을 맡도록 하였다. 3월 19일 함안면 내 중심지인 봉성동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군중을 지휘하였다. 최초 수백 명으로 시작한 만세시위는 사람들의 가세로 삽시간에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일제 경찰이 폭력적인 진압에 나서자 시위 군중은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경찰관 주재소, 군청, 우체국, 법원출장소 등 일본 식민통치 기관들에 대해 투석전, 내부 난입과 파괴, 관계자 폭행 등 물리력을 행사하였다. 후일 재판정에서 시위 군중에게 폭행당하였던 함안 군수 민인호(閔麟鎬), 일제 경찰, 우체국장 등이 증인으로 섰는데,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가 시위대를 선두에서 지휘하였고, 기물 파괴와 관계자 폭행을 선동했다고 진술하였다. 일제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도 시위대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저녁 무렵 경찰 요청으로 총검으로 무장한 마산 중포병대대가 출동하여 진압하였다. 군대가 투입되고 군경 합동의 본격적 진압이 시작되면서 시위대는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 군경은 만세시위 참가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벌였고, 이튿날인 3월 20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결국 붙잡혀 혹한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거쳐 다른 62명과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5일 대구복심범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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