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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龍浩

浩

1889. 3. 11 ~ 1920.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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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龍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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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음성(陰城)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음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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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음성군 소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9년 3월 11일 충청북도 음성군(陰城郡) 소이면(蘇伊面) 중동리(中洞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재관(李在官)이 있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1일 음성군 소이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음성군 소이면의 한내(漢川)장터 만세운동은 김을경(金乙卿)을 중심으로 이중곤(李重坤)·권재학(權在學)이 주도하였다.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상황을 파악한 김을경은 이중곤·권재학과 의논하여 소이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한내장터의 장날인 1919년 4월 1일 만세운동을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1일 오전 11시경 김을경·이중곤·권재학은 한내장터로 나와 장터 한 가운데서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주변의 주민들에게 다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면서 선창하였다. 장터에 나왔다가 이 모습을 목격하고 크게 공감하여 2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합류하여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였다. 이후 김을경의 지휘에 따라 만세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 앞으로 이동하여 일제의 통치기관에 직접적으로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김을경은 면사무소에 있던 면장 민병식(閔秉植)을 앞뜰로 끌어내 “너도 조선 사람인즉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자. 만일 불응할 경우 죽이겠다”라고 윽박질러 민병식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였다. 이에 기세가 올라 더욱 큰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고, 만세시위에 동참하는 주민들도 더욱 많아져 1,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만세시위가 발생하고 점차 규모가 확대되어 가자, 일제 경찰들이 출동해서 시위의 즉각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에 불응하고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일제 경찰은 시위의 주도자로 파악한 김을경과 이중곤을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분노한 시위대와 함께 권재학의 지휘에 따라 소이면 순사주재소로 쫓아가 김을경과 이중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일제 경찰의 주도자 체포를 규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대를 독려하였다. 권재학은 “어째서 무고한 백성을 체포하는가. 당장 석방하라”라고 호통을 치며 주재소의 장지문을 발로 걷어차 파괴하였다. 이것을 신호로 시위대는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만세시위가 더욱 격렬해지자, 일제는 충주(忠州)의 일본군 수비대를 지원 병력으로 급파하였다. 소이면에 도착한 일본군 수비대는 곧바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하면서 만세시위를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안창렬(安彰烈)·이태수(李太壽) 등 6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4명이 부상당하였다. 이때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일본군 수비대에 붙잡혔다.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인정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2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태(笞) 9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일본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받은 혹독한 고문과 모진 태형의 후유증으로 인해 고생하다가 1920년 3월 12일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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