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承鶴
承鶴1857. 3. 19 ~ 1928. 12.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전기의병(기우만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5)
관련 사건
- · 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5) 1857년 3월 19일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창평면(昌平面) 장화리(長華里)의 장전(長田)마을에서 이최선(李最善)과 성주 이씨(星州) (李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皐)이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이 이종사촌이다. 아들 이광수(李光秀)는 나철(羅喆) 등과 함께 오적암살단(五賊暗殺團)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만세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전통 양반가에서 어릴 적부터 유학을 공부하였고, 관례를 마칠 무렵 부친의 스승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뵙고 역시 스승으로 모셨다. 부친을 비롯해 조부 이규형(李奎亨)까지 3대가 모두 노사의 문인으로 위정척사사상을 전승하였다. 특히 부친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지원할 정도로 기정진의 척사론을 계승하였다. 20세에 과거시험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82년 전라감사 조강하(趙康夏)의 천거로 책문을 지어 고종에게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초시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회시(會試)에 급제하지 못하자, 입신양명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건창(李建昌)·이중하(李重夏) 등과 교류하며 기울어가는 국가의 위기를 논하였는데, 이건창에게 군자의 성품을 지녔다는 칭송을 들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교도들이 기재(奇宰) 등 명망있는 유학자들을 협박·회유하려고 하자, 가족들과 지리산으로 피신하였다가 1895년 4월 귀향하였다. 이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까지 내려지자 크게 분노하였다. 그리고 1896년 초 동문수학한 기우만(奇宇萬)이 창의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면서 부르자, 곧바로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이때 의병부대에서 직접 격문을 작성하여 돌렸고, 외부와의 서신류 등을 정리하는 일을 맡아서 수행하였다. 고종의 해산 칙유에 따라 기우만은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이후 함께 서울로 올라가 적을 토벌하여 힘써 싸울 것을 상소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담양의 수항산(受降山)에서 2개월 동안 은거하며 나라를 걱정하였다고 한다. 10살 위인 기우만과 의병을 다시 일으키는데 실패한 후에도 우의를 다지고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 함께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우만은 시름을 잊게 하는 친구이자 지음(知音)이라고 하였다. 이후 초야에 묻혀 지내며 항상 의병을 일으키는 것에 뜻을 두다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소식을 듣고 밤새 통곡하였다고 한다. 1962년 시가와 산문 등을 엮은 『청고집(靑皐集)』을 손자인 이혁(李爀)이 편집·간행하였다. 문집에는 당시 나라의 상황을 개탄하는 내용을 담은 「상면암최선생(上勉菴崔先生)」·「여기송사(與奇松沙)」·「여고오천(與高梧泉)」이라는 서(書)도 실려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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