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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章寧

章寧

1881. 5. 20 ~ 193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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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章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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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天安)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천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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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신흥무관학교
  • · 서로군정서
  • · 대한군정서
  • · 신민부
  • · 한국독립당
  • · 한국독립군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청산리 대첩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81년 5월 20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목천읍(木川邑) 남화리(南化里)에서 이병칠(李炳七)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숙부인 이병삼(李炳三)의 자식이 없어서 양자로 입적하였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호는 백우(白于), 이명은 다른 한자의 이장영(李章榮, 李長榮)이다. 1900년 신식 군대의 초급장교를 육성하기 위해 설립한 육군무관학교 3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03년 3월 25일 육군 참위(參尉)에 임명되었고, 1904년 친위대 제1대대 견습으로 군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친위대 제2대대에 배속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한 이후 군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군대 해산 당시 일본군 견학단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3년간의 군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인 천안 목천으로 낙향하였다. 11월 말 고향을 떠나 가족들과 함께 만주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08년 2월 만주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자리를 잡았다. 1909년 봄 신민회(新民會)가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서 파견한 최명식(崔明植)과 만나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참여하였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개간 및 농사 활동과 함께 군사훈련도 실시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후 학도단장을 거쳐 교장대리, 교장까지 역임하였다. 1912년 2월 이세영(李世永)·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논의하여 서간도 거주 한인들의 정착을 위해서 동삼성(東三省) 총독에게 한인 귀화를 신청하였다. 1915년 무송현(撫松縣)의 백산학교(白山學校)에서도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서간도 지역의 부민단(扶民團)·교육회(敎育會)·자신계(自新契)의 세 단체가 통합하여 한족회(韓族會)가 성립되었고, 한족회는 4월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를 통해서 한족회가 임시정부 통치 하에 들어가면서 군정부를 군정서(軍政署)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와 구분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라고 불렸다. 1920년 3월말 군정서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군정서의 독판부(督辦部) 부관을 역임하였다. 1920년 1월 25일 일본의 압력을 받은 중국 당국이 신흥무관학교를 수색하고 학교의 폐쇄를 명령하였다. 당시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고, 교사 이범석(李範錫)과 함께 삼원보 방면으로 피신하였다. 대한군정서의 김좌진(金佐鎭)이 이상룡(李相龍)에게 요청하여 대한군정서로 파견되었다. 1920년 4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백종렬(白鐘烈)·강화린(姜華麟)과 함께 대한군정서로 떠났다. 대한군정서에서 참모장(參謀長)을 역임하였고, 군사 훈련과 무기 조달에 노력하였다. 직접 연해주로 건너가 체코제 무기를 구입하여 대한군정서 대원들을 무장시켰다. 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관을 맡아 군사학, 총검술 등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여 대한군정서 대원들의 제복을 제작하고 서일(徐一)과 함께 대민 업무와 군수 및 정보 수집 업무 등 후방지원 임무를 담당하였다. 청산리 전투 이후 홍범도(洪範圖) 부대와 함께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다. 밀산에서 결성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함께 소련의 이만(현 달네레첸스크)까지 이동하였고,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날 때까지 이만에 있었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을 겪은 서일과 함께 밀산 지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밀산 백포자에서 서일과 함께 대한군정서를 재건하였고, 참모에 임명되었다. 남만한족대표회의에 참여하였고, 여기서도 군사부 참모직을 맡았다. 1923년 1월 옌지(延吉)·닝안(寧安)·둔화(敦化) 지역의 한인 사회에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 군벌인 장쭤린(張作霖)에게 한인자치에 필요한 부분을 청원하는 등 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가을 지린성(吉林省) 쉬란현(舒蘭縣) 노흑정자(老黑頂子)로 거처를 옮기면서 활동의 거점을 쉬란현으로 옮겼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지린성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4년 3월 하순 전만통일회주비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남만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4개월간 노력한 결과 1924년 7월 10일 군정서,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대한광정단(大韓光正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노동친목회, 의성단(義成團) 등 8개 단체 대표들이 지린에 모여 주비회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대한독립군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4년 10월 말 3개 단체가 더 참여해 11개 단체가 개최하는 본 회의에서 군사분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를 옹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기 때문에, 임시정부를 둘러싼 입장 차이로 주비회에서 탈퇴하였다. 한편 1924년 4월 편강렬(片康烈)이 단장으로 있는 의성단에서 군 참모를 맡아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의성단은 1924년 7월 남만지역 독립운동단체 통합의 결과 만들어진 정의부(正義府)로 통합되었다. 1925년 1월 무링현(穆陵縣)에서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기 위한 부여족통일회의가 개최되었고, 같은 해 3월 북만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할 군정부인 신민부(新民府)가 성립되었다. 이때 참의원에 임명되어 신민부에서 활동하였다. 1926~1927년 지린성 우창현(五常縣)의 한얼소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한인교육을 위해서 활동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민족유일당 조직운동이 전개되면서 참의부(參議府), 정의부, 신민부 간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3부 통합운동은 실패하였지만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와 국민부(國民府)의 양 계열로 통합되었다. 1930년 한족총연합회와 생육사(生育社)를 모체로 하여 중동선(中東線) 연변 웨이허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중앙 당부의 6개 위원회 중에서 감찰위원장을 지냈다. 한국독립당은 삼본주의를 바탕으로 민본정치의 실현, 노본경제의 조직, 인본문화의 건설을 추구하였다. 1931년 2월 각지 주민회를 연합하여 표면기관으로 한족자치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한족연합회(韓族聯合會)·국민부(國民府)·한족농무회(韓族農務會)·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등의 대표 30여 명이 모여서 시국대책을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중국군과 공동전선을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한국독립당은 같은 해 11월 10일 중동선 철도 연선을 중심으로 한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지청천(池靑天)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조직하였다. 이때 참모관에 임명되었다. 한국독립군은 병력을 모집하고 중국군과 담당지역 및 업무를 협의하는 등 중국군과 연합을 통해 대일항전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만주국군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가족들과 함께 중국 관내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1932년 1월 24일 관내로 이동하던 중 일제에 매수된 중국인에게 암살당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임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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