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裕恒
裕恒1887. 12. 26 ~ 1957. 1.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7년 12월 26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현 (安城市))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낙준(李樂俊)과 이낙중(李洛中)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1일 원곡면·양성면 만세시위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이유석(李裕奭)과 홍창섭(洪昌燮)에게 “오늘 밤 모두 면사무소로 앞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자”는 계획을 전달받고, 그 취지에 공감하여 만세시위 참여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마을 주민인 이한영(李漢榮)·이병오(李丙五)·이유만(李裕萬)·이상근(李相根) 등 200여 명과 함께 면사무소로 가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약 1,000여 명의 원곡면 주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고, 이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갈수록 만세시위의 분위기가 격화되었고, 주도자들이 시위대에게 일제의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이 위치한 양성면으로 향하자고 외쳤다.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대와 함께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4월 1일부터 4월 2일 새벽까지 연합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날 밤 양성면 주민들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는데, 해산 즈음에 행진 대오는 원곡면의 만세시위대를 목격하였다. 이에 양성면과 원곡면의 만세시위대는 연합하였으며, 규모가 2,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시위대와 함께 일제 경찰관 주재소로 향하여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등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양성우편소, 양성면 면사무소, 평소 지역에서 원성이 높던 일본인의 상점과 집으로 향하여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가 해산한 다음날인 4월 3일 일제는 원곡, 양성 지역으로 조선주차군 제79연대 3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색출 과정에서 체포되어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원곡, 양성의 연합 만세시위의 폭력성을 부각시켜 전국적인 만세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획책하였다. 이유석·홍창섭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검사국에 의해 이른바 내란죄의 혐의로 고등법원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은 ‘만세운동은 소요죄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고 판결하고, 경성지방법원을 관할 법원으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이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을 선언함에 따라 실제 재판은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진행되었다. 이 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방화 등의 이유로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