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允文
允文1882. 8. 23 ~ 1922. 5. 1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1919년 강화군 부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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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2) 1882년 8월 23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官廳里)에서 태어났다. 강화 읍내에서 미곡상을 하였고, 천주교도이다.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강화군에서는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의 유봉진(劉鳳鎭), 선두리의 황도문(黃道文)·황유부(黃有富)·염성오(廉成五)·장윤백(張允伯) 등 감리교계 인사들의 주도로 1919년 3월 18일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부내면 읍내 장터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는 10,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3월 11일 유봉진·황도문·염성오 등은 황유부의 집에서 만세시위 거사일을 강화 읍내 장날인 3월 18일로 정하고,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배포할 「독립선언문」·「강화 인민에게」·『국민회보』 등을 인쇄하였고, 만세시위에서 주민들과 함께 부를 「독립가」도 만들었다. 장터 상인들의 연락망을 통해 사전에 유봉진 등이 준비하는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곧바로 동의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18일 강화 읍내의 윗 장터와 아랫 장터에는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인근 주민들이 집결해 있었다. 만세시위가 시작될 즈음 모여든 사람은 약 10,000명을 헤아렸다. 오후 2시경 유희철(劉熙哲)·황일남(黃日男)·황윤실(黃允實) 등의 결사대원들이 먼저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것을 신호로 장터에 나온 주민들과 함께 일제히 호응하여 큰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유봉진 등의 지휘에 따라 대열을 갖추고 장터에서 강화향교(江華鄕校)를 거쳐 군청으로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연달아 불렀다. 강화경찰서에서는 만세시위 진압을 위해 김덕찬(金德贊)·염이선(廉履善)·유재면(柳在冕)·김순덕(金順德) 등 5명의 한국인 순사보를 출동시켰다. 이들은 만세시위 초기 고압적인 자세로 시위대를 향해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선두에서 결사대원으로 활동하던 유희철과 조기신(趙基信) 등을 체포해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시위대는 한국인 순사보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하라고 압박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들은 기세가 꺾여 더 이상 시위대를 진압하지 못하였고, 강화군수 이봉종(李鳳鍾)은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수가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자, 만세시위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유봉진은 구속자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시위대를 지휘하여 경찰서로 행진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오후 5시경 독립만세를 외치고 강화경찰서로 행진하면서, 구속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서 유봉진·이사국(李思國) 등과 함께 약 3시간 동안 경찰서를 향해 “연행한 유희철·조기신 등을 즉각 석방할 것과 시위대를 향해 칼을 뽑아 들고 해산할 것을 협박했던 김덕찬 등의 한국인 순사들을 인도하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경찰서를 습격할 것”이라고 압박하였다. 이에 따라 대규모 시위대의 기세에 눌린 경화경찰서는 만세시위 초기에 체포한 주도자들을 풀어줬다. 이들과 함께 강화 읍내 곳곳을 행진하며 밤늦게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밤 11시경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강화도로 출동한 일제 군경의 대대적인 조사와 색출 과정에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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