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載根
載根1894. 7. 27 ~ 1926. 11.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철산군 철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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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4년 7월 27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철산면(鐵山面) 동부동(東部洞)에서 태어났다. 철산의 천도교계 인물로 추정되며, 이발사로 일하였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철산에서 안태영(安泰英)·심치규(沈致珪)·안봉국(安奉國)·김영락(金永洛) 등과 함께 장터만세시위를 기획하고 주도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 만세운동은 3월 1일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명흥학교의교사 안태영이 주도하였다. 안태영과 명흥학교 교직원들이 철산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지역의 기독교계, 천도교계, 그리고 일반 사회인 측에서 각각 대표자를 모으기로 하였다. 3월 3일에 열린 첫 번째 회의를 시작으로 네 차례의 회합에서 준비 방법과 실무 사항들이 논의되었는데, 시위 날짜는 읍내 장날인 3월 7일로 예정하였다. 만세시위의 시작 장소는 기독교 교회당으로 결정하였고, 예배당의 종소리를 독립선언식의 신호로 보자고 합의하였다. 이 무렵 유봉영(劉鳳榮)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여 주도적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특히,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천도교 측에서 담당하였는데, 자택에서 시위 현장에 배부될 독립선언서를 책임지고 등사하였다. 3월 7일 정오에 약속된 종소리가 동부동의 기독교 예배당에서 울리자, 철산의 기독교·천도교 계와 일반 주민 등 1,000여 명이 예배당 안으로 모여들었다. 주최 측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제창한 다음, 준비해 온 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 나누어 주고 시가 행진에 나섰다. 시위에 참여한 군민들이 함께 만세를 불렀으며, 이날 시위대의 규모는 5,000여 명이 넘었다는 일제 측 자료가 있다. 시위 과정에서 우편국 앞에서 직원들과의 투석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이 때 일제 헌병이 파견되어 시위대를 향하여 실탄을 발포하였다. 일제 헌병이 총검이라는 무력적 방법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기 때문에 현장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만세시위 관련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일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1919년 5월 3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이번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된 세계평화민족자결론이 각국 신문에 게재된 것과 조선민족대표 33인의 선언서가 계속 공포된 것을 듣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일은, 한국 민족으로서 당연한 의무에 속하는 천연적 이유가 있으며, 본인 역시 한국 민족의 한 일원으로 만세를 부른 것이니 무죄이다.”라고 다시 상고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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