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在洛
在洛1886. 8. 26 ∼ 1960. 9. 25 ~ ?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제2차 유림단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6년 8월 26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웅촌면(熊村面) 석천리(石川里)에서 이석륜(李錫倫)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학성(鶴城)이며, 자는 선칠(璇七), 호는 강석(江石)이다. 인품이 높아 주변 사람들에게 ‘율동어른’으로 불렸다. 유림의 대가인 김창숙(金昌淑)의 차녀 김덕기(金德基)를 장남 이동립(李東立)과 결혼시켰다. 1925년 사돈인 김창숙이 주도한 제2차 유림단사건에 참여하였다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였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이웃 마을에 거주하던 이수일(李樹一)이 서울 만세운동에 대해 문의하기 위해 방문하자, 이수일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었다. 이후 이수일은 이수락(李壽洛)·이희계(李希季)·이쾌덕(李快德)·이용락(李龍洛) 등과 함께 울산군 온양면(溫陽面) 남창리(南倉里)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정하고, 그해 4월 8일 남창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923년에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4년 8월에는 경상남도 평의원(慶象南道評議會)으로 민족의 앞날을 개척하기 위해 마을 풍속을 개선시킨다는 의미로 '부락개량회(部落改良會)'를 만들고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경남 유생을 규합해 단체를 만들고 사회교화를 목적으로 경남유림대회를 거행하기 위한 발기인으로 양산군(梁山郡)의 권목(權穆)·이곤녕(李坤寧) 등과 함께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5년 8월 김창숙이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들어와, 경기도·충청도·경상도 지역의 유림과 부호들을 비밀리에 찾아다니면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9~10월 손후익(孫厚翼)에게 김창숙이 국내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유성온천(儒城溫泉,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봉명동)에서 충남 진잠군(鎭岑郡,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일대)의 이원태(李源泰)를 만나 군자금 모집 상황을 점검하던 김창숙을 만났다. 그해 11월 김창숙이 대구(大邱)로 내려와 각 지역의 유림을 모아 구체적인 군자금 모집을 논의하면서 독려할 때, 김화식(金華植)을 통해 독립운동자금 제공을 요청받았다. 그러자 1926년 1월 1차로 200원을 제공하였고, 다시 2차로 대구여관 주인 정숙이(鄭淑伊)를 통해서 800원을 제공하였다. 또한 군자금 20만원 모집 계획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1926년 3월 17일 부산(釜山)의 범어사(梵魚寺)에서 손후익·정수기(鄭守基) 등과 함께 해결방안 논의를 위해 모였다. 일설에는 1926년 초 아들 이동립도 그와 장인을 도와 군자금 모집에 참여하였고, 그는 손후익과 함께 국내에서 모집한 5,000원의 군자금에 대한 협의를 위해 범어사 금강암에서 모일 때 동참했다고 한다. 이 일로 1926년 5월 9일 울산으로 파견된 대구경찰부 고등계의 일제 형사에게 붙잡혀 대구경찰부로 압송되어 조사받았다.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100일 본형 산입)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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