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裕奭
裕奭1886. 4. 25 ~ 1950. 1. 1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6년 4월 25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유로(李裕魯)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양성면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소식이 경기도 안성에도 전파되었다. 이에 따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서의 만세시위는 3월 28일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위치한 원곡면사무소(元谷面事務所)에 모여 만세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31일까지 매일 지속되었다. 이러한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1919년 4월 1일과 2일에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七谷里)에서 홍창섭(洪昌燮), 동면(東面)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이근수(李根洙), 동면 내가천리(內加川里) 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룡(李熙龍)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4월 1일 오후 8시경 원곡면 주민 약 1000여 명은 원곡면사무소 앞에 다시 집합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안성군 양성면(陽城面) 동항리(東恒里, 구 양성읍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태극기를 들고 등불·횃불을 켜고 만세를 연달아 부르며 원곡면내를 행진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에 다다르자 군중에게 “오늘 밤 기약함이 없이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인 것은 천운이고, 양성경찰관주재소로 가서 일본인 순사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되며, 순사가 이에 응하면 좋으나 응하지 않으면 자기로서도 할 바가 없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4월 1일 오후 9시 반 경부터 양성면 주민 수백 명이 양성경찰관주재소(陽城警察官駐在所)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9시 50분 경 해산하였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원곡면 방면에서 온 이유석 등이 지휘하는 원곡면민 시위대와 만나 합류하여 밤 10시 경 양성경찰관주재소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주재소에 투석·방화하였다. 함께 간 군중에게 돌을 가지고 가서 주재소를 부수고 만세를 부르자고 지휘하였다. 이때 면장을 끌어내고 태극기를 들게 하여 군중의 선두에 세우고 동행한 면민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또한 양성우편소(陽城郵便所)에서 안성으로 통하는 전화선을 절단하고, 부근의 전신주를 넘어뜨려 통신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마을에 거주하는 일본인 잡화상 토자토 토요테(外里與手)의 가게와 일본인 대금업자 다카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습격하였다. 홍창섭과 함께 토자토의 가게에 들어가 기물을 끄집어내고 그 자리에 성냥으로 방화를 하였다. 또한 다카이의 집 문을 파괴하고 가구류·기물을 집 바깥뜰에 들어내어 방화하였다. 그리고 함께 간 면민에게도 가게와 집을 부수도록 지휘하였다. 이후 동리 가운데에 있던 양성면사무소(陽城面事務所)로 가서 물품을 부수고 서류를 끄집어내어 사무소 바깥에서 불태웠다. 4월 2일 오전 4시 경 다시 원곡면사무소에 몰려가서 숙직실에 불을 지르고, 사무실 내부의 서류·기물을 소각하면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함께 간 면민에게 방화·투석 등을 지시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원곡면사무소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투석을 하였다. 안성경찰서는 이후 원곡면과 양성면 주민 수백 명을 체포하였다. 4월 1과 2일의 시위를 주도하고 치안방해와 폭행을 한 혐의로 일제 경찰의 검거 대상이 되었으나, 붙잡히지 않았다. 이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이유로(李裕魯)라는 가명으로 계속 피신 생활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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